어느 멋진 토요일

by 보라

토요일이었어.


21세기가 시작되던 해의

6월 마지막 주 토요일.


시간이 아직 천천히 흐르던 시절이었어.


갑자기 기온이 올라 무덥던

초여름 오후로 기억해.


주 5일제가 정착하지 않았던 그때는,

토요일은 일찍 퇴근을 하는 달콤한 날이었지.


서둘러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한껏 들떴고, 바빴어.


음, 5시에 소개팅을 하거든.


'어떤 옷을 입어야 날씬해 보일까?'


'배를 조금이라도 집어넣으려면 점심을 굶어야겠지?'


온 신경이 5시 약속에 집중되어 있던 터라

굳이 다이어트가 아니어도 입맛도 없더라고.


아름다움을 위해 점심까지 양보한 나는

한참을 거울 앞에서 보냈어.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었다 벗었다,

파란 꽃무늬 헤어밴드를 묶었다 풀었다,

굽 있는 샌들을 신었다 던졌다...


거울 앞 실랑이는 결국

하얀 블라우스 위에 쫙 붙는 검정 카디건,

찢어진 청바지,

스니커즈로 마무리됐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옷을 선택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겨.


세상에, 찢어진 청바지라니!






5시.


표면에 투명한 물방울을 만들어낸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앞에 두고


우린 만났어.


꿈을 찾아가는 여자

꿈을 이뤄가는 남자


세상이 아름다운 여자

세상에 도전하는 남자


20대를 유영하는 여자

20대를 보내버린 남자


8살 차이.


'서른 하고도 두 살이나 넘어가버린 사람은

얼마나 늙었을까?'


20대의 눈에 서른은

마치 인생의 끝을 의미하듯

멀게만 느껴졌어.


늙은 아저씨라면

어떻게 거절하고 나와야 할지

내심 걱정했으니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웃겨.


그는 걱정과 달리

대학생처럼 풋풋한 외모와

바른생활 자세와

성실한 사고를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무더위를 예고하는 6월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나란히 걸어가는 우리 피부를 감쌌고,


축축하고 끈적한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월미도 바닷가를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뱅글뱅글 돌아가는 놀이 기구의 움직임,

까만 밤을 동그랗게 수놓은 불빛,

어느 바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재즈 선율,

유원지 특유의 생기 있는 분위기와

비릿한 바다 냄새...


​군중은 떠다니듯 미끄러지고,

거리엔 음악이 넘쳐흘러.


그곳엔

너무나 설레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여자와

그 여자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있어.


웃고, 또 웃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그의 목소리를 가슴에 담고, 또 담고,

행복에 취해 걷고 또 걸었어.


몽환적인 선율에 끌려 들어간

어느 재즈 카페.


우린 또 이야기를 나누었지.

음악 이야기, 사는 이야기, 꿈 이야기.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고,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유난히 뜨거웠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출 날이 오길

기도했을 거야. 하지만,


순수했던 20대의 소망은

독하게 머물다 간 열병이 되더라.


나는 지금도 생각해.


내 생에 스물네 살,

6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보다

멋진 토요일이 또 있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지독히도 슬픈 그 토요일이

내 삶에 또 있을까?





월미도 재즈카페 VERVE


난 가끔,


아주 가끔,


그날,


그 밤,


월미도 한 편의 재즈 카페를 찾아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그때 그 자리에서


언젠가 다시 그 멋진 토요일이 온다면

그대에게 꼭 말할 거야.


"당신을 알게 된 토요일이

나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당신은 참 고마운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