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길을 잃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남반구의 여름을 향해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베이징 공항 2 터미널과 3 터미널을 오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승 비행기를 놓쳤다.
호주로 향하던 길 한가운데서 멈춘 채,
지금 이 자리에 머물고 있다.
1월의 호주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여름이다.
내게는 겨울이라는 죽은 시간을 벗어나
남쪽나라의 햇볕을 찾아가는 일,
그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물론 직항노선이 가장 편하지만,
여행 경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보겠다는 마음에
경유 항공권을 선택했다.
인천에서 에어차이나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한 뒤,
두 시간 반 후 동방항공으로 갈아타
시드니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레이오버 시간도 적당하고 가격도 괜찮았다.
모든 것이 그럴싸해 보였다.
출국 전, 인천공항의 긴 발권 줄에서 기다리며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서 있던 그때만 해도 몰랐다.
내가 베이징 공항 셔틀버스 안에서
이런 글을 쓰게 되리란 걸.
에어차이나는 베이징 공항의 3 터미널에 도착하고,
동방항공은 2 터미널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두 터미널 간 이동 시간만 셔틀버스로 20분.
그 사이 입국심사와 임시 비자 발급,
다시 출국심사까지 마쳐야 했다.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만 해도
이렇게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음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는 대륙이다.
인천공항을 떠올리면 안 된다.
공항의 크기도, 절차의 속도도,
심지어 직원의 태도조차 한국과는 달랐다.
게다가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연착까지 되었다.
환승 시간은 고작 두 시간.
그래도 ‘두 다리 튼튼하니 뛰어다니지 뭐’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전력질주.
끝이 안 보이는 복도를 달리고,
무빙워크를 런웨이로 바꾸며,
비자 발급 데스크를 찾아 두 눈을 굴렸다.
문제는 안내 직원들의 대답이 전부 달랐다는 것이다.
비자 데스크는 이쪽이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하고,
다시 저쪽이라고 하고.
우왕좌왕하다 보니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차오르고,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유산소 운동과 속앓이를 동시에 해낸 기염을 토한 것이다.
결국 비자 신청과 심사,
트램과 셔틀버스를 오가는 동안
시간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시간은 흘렀고, 발권 마감 시각이 다가왔다.
‘아, 망했다.’
가슴이 타들어가고 목이 바짝 마른다.
신경이 곤두서고,
동시에 날카로워진 신경을 억누르기 위해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책에서 본 문장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랜다.
'걱정의 90%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감정 낭비다.'
2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달렸다.
그러나... 발권은 이미 마감되어 있었다.
단 6분 차이였다.
눈빛에 애처로움을 담고 온갖 사정을 읊었지만,
안 되는 건 역시 안 된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미 끝난 싸움이라 생각해서였을까?
어쨌든 이건 한 편의 사건이 되었다.
이제 남은 임무는... 수하물 찾기.
문제는 수하물도 함께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2 터미널 직원은 "3 터미널에 있다"라고 하고,
3 터미널 직원은 "수하물 서비스 센터로 가라"라고 한다.
2 터미널과 3 터미널을 대체 몇 번을 오가는 건지.
서비스 센터 직원은
"2 터미널에 있으니 이 쪽지를 보여줘라" 한다.
또 셔틀버스를 타고 2 터미널로.
그곳에서 영어가 서툰 직원과
한참 보디랭귀지를 주고받는다.
"수하물... 미싱... 캐리어... 나... 기다려..."
몇 번을 반복하며 간신히 수하물 센터에 도착했으나
매번 다른 직원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걷는다.
불과 몇 분 전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돌아온다.
눈앞에서 데자뷔가 펼쳐지는 느낌이다.
드디어!
내 캐리어들과 재회했다.
어디서 굴렀는지,
먼지와 얼룩이 묻은 나의 캐리어는
마치 땟국물 묻은 어린아이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하아... 험난한 여정이었단다..."
캐리어를 끌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엔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고,
안심한 순간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글로나마 이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리저리 나를 돌게 했던 직원들에게 아쉬움도 있지만,
그보다 친절하게 응대해 준 직원들이 더 많았기에
고마움이 더 크다.
지금은 다시 3 터미널로 향하는 길.
연착으로 비행기를 놓친 만큼,
에어차이나 측에 책임을 요구할 생각이다.
물론, 비행기 표를 다시 사야 할 수도 있고,
시드니 첫날 숙소와 일정을 통째로 날릴 수도 있다.
록스 마켓, 왓슨스 베이 트레킹,
본다이-쿠지 비치 코스탈 워크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밖을 보니 베이징의 하늘은 뿌연 안개에 싸여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미스트.
하지만, 알고 있다.
조금만 지나면
투명한 시드니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음을.
낯선 공기 속, 낯선 침대,
살며시 커튼을 젖히는 설렘이 기다리고 있음을.
Everything is OK.
Everything is alright.
2019년 1월 12일, 베이징에서
[추신]
항공사의 배려로
다음날 새벽 1시 40분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원래 일정보다 4시간 늦었지만,
이젠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하하하' 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베이징 공항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덕분에 공항 곳곳을 안내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가 되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