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디파인을 보내다

by 보라

1월 1일, 새해의 첫 아침.


새로운 시작을 여는 날이니만큼

새 옷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프리미엄 아웃렛으로 향했다.

(핑계는 언제나 새해가 제일 관대하다.)


휴일이라 그런지

드넓은 주차장은 차들로 꾹꾹 눌러 차 있었고,

공기마저 들떠 상큼한 냄새를 풍겼다.


겨울이라기엔 이상할 만큼

기온은 25도를 훌쩍 넘었다.

입고 온 겨울 점퍼를 차에 벗어두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매장을 오갔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룰루레몬.


저 멀리 간판이 보이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마치 보고 싶은 이를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괜히 숨이 가빠졌다.






매장 안은 인기 브랜드답게

사람들로 가득했다.

활기찬 분위기는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원하는 옷을 누가 가져가면 안 되는데.'

그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로,

그 예감이 현실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너무 예쁜

룰루레몬 디파인 자켓.


블랙 바탕 위에

은은한 빛을 남긴 채

옷걸이에 딱 한 장 걸려 있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아니 오래 찾아 헤맨 사랑을 마침내 만난 사람처럼

나는 그 앞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아... 너무 예뻐. 이거, 내 거야."


가방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아주 소중하게

자켓을 들고 거울 앞으로 갔다.


'이렇게 예쁜 건 다시 없을 거야.

너는 내 운명이야.'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사이즈 2짜리 디파인 자켓 안에서

숨을 들이마셔야만 지퍼를 올릴 수 있었다.


돌고래처럼 매끈해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숨을 내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블랙 바탕에

보석가루를 살짝 뿌려놓은 듯

고상하게 빛나던 나의 디파인 자켓은

그 순간부터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차분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아무도 보지 못하게

디파인을 옷 사이에 깊이 걸어두었다.


'내 몸을 저 옷에 맞출까, 다이어트해서?'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마음으로 샀던 옷들이

지금 옷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에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움과 함께

디파인을 보냈다.


다른 옷을 보려 해도

눈앞에는 온통

그 자켓만 어른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깊이 숨겨 놓았던 나의 디파인은

입으면 찢어질 것만 같은

어느 누군가의 손에 들린 채,

매장을 나갔다.


'그냥 데려올 걸 그랬나.'

'나를 맞출 걸 그랬나.'


후회가 물처럼 밀려왔다.


새해 첫날,

나는 옷 하나를 사지 못했고

대신

미련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련마저

조금은 반짝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만 더 나를 바꾸면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을

곁에 두고 살아왔다는 걸.


숨을 참고 지퍼를 올려야 하는 옷처럼,

애써 나를 줄이고 눌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들, 관계들, 선택들.


그때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했고,

그 결과는 대부분

옷장 깊숙한 곳에 남아

잊힌 채로 쌓여갔다.


디파인은 예뻤다.

정말로.


하지만 나를 편안하게 안아주지는 않았다.

입으면 찢어질 것 같은 옷을

'운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나는 이제

숨 쉬는 일이 너무 중요해졌다.


어쩌면 인생도 비슷한 것 아닐까.


아무리 반짝여도

나를 조이지 않는 것,

내 호흡을 빼앗지 않는 것만이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선택이라는 걸

새해 첫날,

자켓 하나로 배웠다.


그래서

그 옷을 두고 온 일을

조금은 잘한 선택이라 생각해본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대신 나는

나에게 맞는 삶 쪽으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디파인이든,

그와 닮은 어떤 선택이든.


아무리 예뻐도,

숨이 막히는 인생은 이제 입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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