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프레즈노 '블라섬 트레일'에서 만난 봄
동네를 한 바퀴 걷다 보면
제 시절을 만난 꽃들이 있다.
그들은 도미노처럼 차례를 지켜 등장하기도 하고,
눌러도 눌러도 고개를 드는 두더지 인형처럼
연이어 얼굴을 내민다.
꽃의 시작은 언제나 매화였다.
뒤이어 유채꽃이 들판의 결을 노랗게 바꾸고,
하얀 팝콘처럼 송이진 아몬드꽃이 공기를 부풀린다.
밤하늘의 별을 닮은 라벤더 별꽃,
꽃잎을 둥글게 뻗은 샤스타데이지,
톡 쏘는 색감의 캘리포니아 포피,
그리고 봄날의 상징처럼 찾아오는 벚꽃.
길가의 이름 모를 가로수 꽃들과 힐 위의 들꽃들까지,
이 계절의 주인공은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참, 짧은 격정이 지나갈 즈음
슬픔을 달래듯 조용히 피어날 5월의 장미도 있다.
지금의 캘리포니아는
꽃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네가 이 정도라면,
끝을 가늠할 수 없이 펼쳐질 과수원의 봄은 어떨까.
울긋불긋 꽃대궐을 차린 길,
프레즈노의 블라섬 트레일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매년 봄,
2월 중순에서 3월 사이 샌 호아킨 밸리로 들어서면
아몬드, 자두, 살구, 복숭아, 사과, 오렌지까지
과일나무 꽃의 행렬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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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안고 나섰지만 마음 한편이 슬며시 불안해졌다.
따뜻하다 못해 더운 날씨 탓에 길가의 과일나무들은
이미 꽃잎을 떨군 뒤였다.
연두색 잎으로 옷을 갈아입은 몸들.
'오늘 헛걸음은 아닐까.'
걱정과 기대,
혹시 모를 반전이 비슷한 무게로 동행했다.
하지만 시모니언 농장의 낡은 풍향계가
팽그르르 도는 것을 보는 순간,
걱정은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블라섬 트레일의 시작이자 끝,
시모니언 농장이다.
마당에 전시된 고물 농기구들과
사금 채취 체험 시설은
이곳의 역사를 증명한다.
골드러시의 열풍이 사그라든 후,
금을 찾던 마이너들이 농부가 되어 일구어낸 것이
바로 지금의 거대한 아몬드나무 숲이다.
땅 아래의 금 대신
땅 위의 생명을 선택한 농부들의 땀방울이
지금 내 눈앞의 풍경을 만든 셈이다.
농장 마켓에 들어서자 말린 과일과 견과류,
와인과 잼, 갓 수확한 과일과 채소들이
농부의 시간을 증명하듯 놓여 있었다.
오렌지 한 망과 양파 한 바구니를 들고 돌아와
냉장고를 채운다.
며칠간은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오렌지일 것 같다.
트레일은 약 70마일.
차로 이동하며 꽃잎들이 세운 울긋불긋한 궁궐을 지난다.
트레일 초입에서 만난 아몬드나무는
이미 꽃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문득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올랐다.
1890년,
조카의 탄생 소식을 듣고 생명의 환희를 담아 그렸던
<꽃 피는 아몬드 나무>.
게티 센터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그의 원화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이름 모를 울컥함이 다시 차올랐다.
고독했고, 위대했고, 불행했던 화가.
고흐가 그토록 축복하고 싶었던 생명의 빛깔이
지금 내 눈앞에서 향기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분홍빛 복숭아꽃이 지나고,
단물이 뚝뚝 떨어질 듯 탐스럽게 열린 오렌지는
단단한 열매로 나무에 매달려 있다.
나무는 자신의 계절을 통과한 결과를 조용히 품고,
곧 나눌 준비를 한다.
멀리 하얀 머리띠를 두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구릉은
지금이 그들의 시대임을 말해준다.
나는 그 풍경 속에 잠시 초대받은 손님일 뿐.
트레일을 모두 돌아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
프레즈노에 오기 전날 밤,
책에서 읽었던 김광석의 노랫말이 맴돌았다.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기는 어려워라.'
김광석이 노래하고자 했던 주제는
화려한 봄날이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보며 그 문장을 곱씹었다.
모진 비바람을 견뎌야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고,
화려한 꽃잎을 기꺼이 떨구어내야만
비로소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꽃이 지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다음 생애를 향한 영광스러운 이별인 것이다.
짙은 꽃향기에 이끌려 도착한 꽃대궐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꽃놀이를 넘어,
삶의 순서를 다시 배우는 과정이었다.
흩날리는 꽃비 사이로,
다가올 계절의 열매를 미리 꿈꾸어본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