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낭비와 진심의 무게 사이에서

by 보라

​때때로 책장 앞에서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듯한

묘한 힘을 느낄 때가 있다.


인쇄기에서 막 나온 듯 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매끄러운 종이의 촉감.


가슴에 꼭 끌어안고

강렬한 입맞춤이라도 전하고 싶을 만큼

책은 매혹적인 얼굴로 나를 불러 세운다.


​그날도 그랬다.

온갖 호기심을 자극하는 냄새와 부드러운 촉감,

지적인 매무새에 홀리듯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표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핑크빛 베이지의 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붉은색으로 강조된

'나로'라는 글자 때문이었을까.


잔디밭에 누워 세상을 초월한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이끌려

나는 홀린 듯 책장을 넘겼다.


​그 안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우리 삶에서 곧 사라질 존재들에게
마음의 에너지를 쏟는 것 역시 감정의 낭비다.

그만두면 끝일 회사 상사에게,
어쩌다 마주치는 애정 없는 친척에게,
웃으면서 열받게 하는 빙그레 쌍년에게,
아닌 척 머리 굴리는 여우 같은 동기에게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마음 졸여도, 끙끙거려도, 미워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문득 지난날들이 스쳤다.

친구들과의 모임, 직장 동료와의 회식,

숱한 인연과의 술자리들.


한참을 웃고 떠들다 돌아오는 길은

늘 이상하리만큼 쓸쓸했다.


어느 순간 나를 할퀴고 간 상처들이,

혹은 내가 의도치 않게 남긴 상처들이 떠올라

슬픔이 차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럴 수도 있어.'

상대의 무례함을 이해라는 이름으로 감싸 안으며

억지로 위로를 건넸다.


​그런데 책은 내게 말한다.

그 모든 노력이 '감정의 낭비'였다고.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던 내 마음의 수고가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선언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른거리는 얼굴들을 털어내 보려 애를 써본다.

​우리가 함께 나눈 기억,

행복이라 믿었던 순간들,

그리고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애써 눈을 감았던 외면의 시간들.


그 깊은 슬픔의 시간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게 쏟아부은 낭비였을까.

정말 그럴 수 있는 걸까.


​내 마음이 이 문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마도 내 곁을 스친 이들을 차마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단정 짓지 못하는

미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늦은 밤, 창문을 여니 비가 쏟아진다.

지금 이 비처럼,

결국 한바탕 세차게 내리다 스쳐 지나갈 사람들.


그들에게 더 이상 깊은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어버리면,

정말 내 마음은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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