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봉평 들녘, 메밀꽃 사이로

by 보라

해발 700미터를 넘는 강원도 평창의 고랭지.


그중에서도 ‘고랭길’은, 이름부터 이 지역의 특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예전 봉평장이 서는 날이면, 면온에서 봉평으로 향하던 장돌뱅이들이 이 길을 넘었다고 한다.


길은 곧 삶이었고, 삶은 곧 길 위에 있었다.






해마다 메밀꽃 개화 시기에 맞춰 열리는 효석문화제가 한창이던 9월 초, 나는 이 길을 천천히 걸었다.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가을의 문턱에서 서서히 식어가던 날, 살갗을 스치는 바람은 실크처럼 가볍고,
그 가벼움은 마음까지 어루만졌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풍경,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밭, 그 속에서 이효석의 소설 장면이 아련하게 겹쳐진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





한여름 폭염 속에서 몸과 마음의 기운을 다 쏟아낸 터였다. 그 후로 처음 맞이한 가을바람은 머리칼을 살살 흩날리며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 고맙기만 한 존재였다.






연둣빛과 자줏빛이 고운 들녘, 적당히 땀나는 오르막을 지나며 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색감 하나도 감동이 되는 순간이다.






오랜 시간 걸은 끝에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조망.
가슴 깊이 들이마신 공기는 폐부까지 시원하게 적셨다.






마침내 도착한 하얀 메밀꽃밭.


길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풍경은
작은 바람에도 꽃잎이 춤추듯 일렁였다.

이효석이 황홀해하며 소설에 담아낸 풍경,
이제는 나 또한 그에게 공감할 수 있다.


소설 속 허생원과 성씨 처녀의 이야기를
메밀밭 사이로 스치듯 떠올린다.






지천에 깔린 메밀꽃,
그 사이사이 고개를 내민 코스모스,
맑고 시원한 봉평의 공기.
이 모든 것이 마음 깊은 곳을 살며시 흔든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효석,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그 사랑처럼 짧고 애틋한 이 계절이
지금도 무심히 흘러가고 있음이 안타깝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이맘때면 봉평이, 고랭길이,
그리고 메밀꽃이,
내 마음속을 가만히 다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