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브뤼헤 여행기
브뤼헤에 도착한 건, 겨울 이른 아침이었다.
전날 내린 비가 그친 뒤,
도시 전체가 안갯속에 잠겨 있었다.
젖은 돌길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고요한 광장 위로
종탑은 희미한 윤곽만 남긴 채 솟아 있었다.
운하 위로는 백조가 떠 있었고,
'사랑의 호수'라 불리는 연못은
몽환적인 기운으로 나를 맞이했다.
마차는 손님을 기다리듯 광장 한쪽에 줄지어 서 있었고,
중세 상인들의 길드 하우스와 수도원, 성당들은
마치 시간을 멈춘 듯 서 있었다.
브뤼헤가 내게 건넨 첫인상은 '신비로움'이었다.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더 깊은 매혹을 품은 도시.
그런데 몇 년 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킬러들의 도시(In Bruges)〉 속에서
그때 내가 걸었던 도시를 다시 만났다.
운하와 돌길, 종탑과 광장...
모든 것이 화면 가득 살아 있었다.
켄(브렌던 글리슨)이
보트를 타고 풍경을 바라보던 장면은,
운하 위에서 마음속으로 풍경을 담던
내 모습과 겹쳐졌다.
영화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킬러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돈을 위해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삶,
성취와 죄책감이 동시에 따라붙는 모순된 세계,
그 앞에서조차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간들.
주교 암살을 지시했던 해리와 켄의 대화는
브뤼헤의 본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모든 게 차가운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어.
거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만들어 냈지.
그리고 그가 뒤돌아보며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가 말하길,
깨어있단 걸 알지만,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안개에 둘러싸인 도시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꿈속 같았다.
영화 속 켄이 마지막으로 종탑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아마도 피로 얼룩진 현실 너머
고결한 세계를 향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브뤼헤는 그렇게,
아름다움과 고요,
그리고 인간 내면의 불안을 함께 품은 도시였다.
나는 그곳을 거닐면서도 브뤼헤가 그리웠고,
영화 속 브뤼헤를 마주하면서 또다시 그리웠다.
돌길을 걷고,
다리를 건너고,
운하를 바라보던 그날처럼...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깨어있단 걸 알지만,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