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아름다움이 겹쳐 번지는 물빛

화천 파로호 산소 100리 길

by 보라
짙푸른 물빛과 바람 속에서,
호수에 스민 역사와 기억을 마주하다.


바다의 물빛을 닮은 호수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을 따라 달린 적이 있습니다.


바다가 아님에도 짙푸르고,

계곡이 아님에도 물속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수면 위에는 투명한 유리알이 흩뿌려진 듯

반짝임이 이어졌고,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호수는 몸을 흔들며 파문을 그려냈습니다.


그곳은 화천 파로호.

아름다움과 아픔이 한데 서린 호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수력발전소 건설로 생겨난 인공호수의 이름은

처음에 '화천호'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중국 공산군 3만 명이 수장된 전투의 기억 위로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고요한 풍경 너머에 숨은 비극을 떠올리자,

호수는 인간의 욕망과 역사가 남긴

상흔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통마저 품어 안는 자연의 포용력으로

저를 압도했습니다.


호수와 북한강을 따라 이어진 길,

'파로호 산소 100리 길'.

잔잔한 물빛을 따라 약 42km 이어지는 길은

마치 기억 속의 긴 호흡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겨울 내내 묵혀 두었던 스트라이다를 꺼내며,

저는 천천히 길 위에 몸을 맡겼습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순간,

늘 시끄럽던 무릎은 잠잠해졌고,

차갑던 계절의 숨결 속에서

작은 자유가 피어올랐습니다.




눈 덮인 산길이 나타나면

자전거를 손으로 끌며 오르고,

굽이진 강가를 돌아 내려서자,

눈앞에 짙푸른 북한강과 '숲으로 다리'가 나타났습니다.


김훈 작가가 이름 붙였다는 이 다리는

마치 강과 숲,

삶과 죽음을 잇는 통로처럼 서 있었습니다.


길은 이어지고,

풍경은 끊임없이 변했습니다.

폰툰교와 구만교,

화천댐과 붕어섬,

연꽃 단지를 지나며,

시간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듯 호흡했습니다.


오랜만의 라이딩에 지쳐갈 무렵,

봄을 예고하는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북한강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온 맑은 바람은

마치 계절의 첫 숨결 같았습니다.


42km를 달리는 동안,

보석처럼 빛나는 물결을 보았고,

얼어붙은 북한강의 차가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겨울 축제의 추억과,

얼음 위에서 버티는 연꽃의 고집,

해빙기 빙벽을 오르던 이들의 땀과 웃음도

함께 스쳤습니다.

하늘은 하얀 캔버스 위에

파란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했습니다.

구름은 흰 붓칠처럼 번져 있었고,

호수는 투명한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빛을 품고 있었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등을 어루만지던 오후,

자전거 위에서,

혹은 돌담에 걸터앉아

그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호수는 그날도 말없이 빛났습니다.


아픔과 아름다움이 한 물결에 스며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번져왔습니다.


파로호를 떠나며,

내 마음 한구석에 그 물빛이

오래도록 마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