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앓이

여행자의 호사, 그 뒤에 남는 일들

by 보라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은 언제나

거대한 흥분으로 시작한다.


​구르르르릉,

시커먼 땅이 들썩이고

바퀴의 구릉 사이로 괴물이 나타난다.

귀를 자극하는 굉음은 괴물의 포효다.


비행기를 낚아챌 기세로 달려드는

대지의 중력을 뿌리치고,

기체는 몸속 에너지를 한껏 끌어모아

하늘로 도약한다.


그 팽팽한 긴장감이 정점에 달해

마침내 공중에 붕 뜨는 순간,

온몸에는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방금까지 입을 벌리고 달려들던 괴물은

먹잇감을 놓친 것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땅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이내 소음은 잦아들고 낯선 고요함이 찾아온다.


​창밖을 내다본다.

괴물이 지나간 시커먼 흔적은

매끄러운 활주로가 되어 있고,

그가 흘린 땀방울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되어 대지를 적신다.


포슬포슬한 산과 네모 반듯한 밭은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빛난다.


​커다란 건물이

성냥갑처럼 작아지는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나는 비로소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선물 받는다.


마치 신이라도 된 듯 아래 세상을 향해

"저런, 저런!" 혹은 "그래, 그래."라며

너그러운 혼잣말을 건네본다.


몽실한 뭉게구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다니는 경험은,

오직 여행자만이 잠시나마 누릴 수 있는

고귀한 호사다.


​하지만 이 호사스러운 풍경 속에서도

예민한 슬픔은 고개를 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통과하고 있는 장소와 시간이,

훗날 내 생의 어느 지점에서

지독하게 그리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여행의 품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벌써 이 순간을 상실할 미래를 걱정한다.


이륙의 설렘이 멈추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 일상의 중력을 견뎌야 할 때,

오늘의 싱그러운 초록과 구름의 감촉은

분명 '앓이'가 되어 나를 찾아올 것이다.


​예감은 곧 사실이 되고,

한동안 하늘 위에서의 기억을 앓으며 살아가겠지만

괜찮다.

그 앓이의 깊이가

곧 내가 누린 호사의 크기였음을 알기에.


​그렇게 여행자는 이별을 예감하며,

다시금 창밖의 먼 세상을 애틋하게 굽어본다.




작가의 이전글설레는 순간 속을 걷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