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런던 튜브에서 만난 한 줄기 빛

by 보라
짧은 만남, 긴 여운.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여행지에서는

천천히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일상과 다른 장소가 내뿜는 고유한 에너지 때문일까.


풍경도,

들이마시는 공기도,

머리칼을 흩날리는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도,

코끝을 스쳐가는 낯선 냄새까지도

모두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이러한 새로움을 만끽하고자

천천히 걷는다.




런던은 유독 자전거로 출근하는 모습이 많다.

잠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에도

거대한 자전거 무리 속에서

브롬톤을 벌써 몇 대째 본지 모른다.


같은 시간,

튜브는 지옥철로 변신하고

빨간 이층 버스는 사람들을 싣고 내달린다.


작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서

바삐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

커피 향이 진동하는 가게 앞을 걷는 일도

그저 새롭고 신기할 뿐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

누군가에게는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여행자에게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유가 된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서운함은 훌훌 털어버리고

좀 더 나은 에너지로 채워가는 과정이

비움과 채움이라면,


그렇게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런던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쯤 에밀리를 만났다.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는 과정 한가운데서.


에밀리는 여행 중 가끔,

아주 가끔 마주하게 되는 행운이자

나를 채워준 깨달음이었다.




에밀리와 만난 날은

런던 여행을 마무리하고

근교 해리포터 스튜디오와

코츠월드를 가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렌터카 사무실이 있는

베이커 스트리트 역으로 바삐 움직였다.


사건이 지하철 안에서 벌어졌기에

런던 지하철과

그 지하철을 이용하는 런던 시민(런더너)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며칠 동안 지하철을 수없이 타고 내리며 느낀 건

런더너들은 너무 바쁘게 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빨리빨리'를 외치며

조급하게 살아가지만

런더너들은 더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고개를 들고

오직 앞만 본 채 빠르게 걷는다.

느린 걸음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추월해 나간다.


UK라는 선진국에 사는 런던 사람들은

여유롭고 느긋할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오직 앞만 보고 내지르는 모습이

일상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잠시 숨이 막혔다.




런던 지하철,

언더그라운드 혹은 튜브라 불리는 곳은

뉴욕 전철만큼이나 작고 낡았으며

플랫폼 역시 좁다.


역에 들어서는 순간

휴대폰은 무용지물이 된다.

데이터 사용은 물론이고 통화조차 불가능하다.

심지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역도 있다.


올드스트리트 역에서 묵었던 우리는

지하 2층에서 튜브를 타야 했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긴 에스컬레이터만 있을 뿐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오직 계단뿐이었다.


곳곳에서 트렁크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구조였다.


우리도 각자 트렁크 하나씩을 들고 끌며

계단을 내려가 플랫폼에 들어섰다.


플랫폼에 들어선 시간은

마침 런더너들의 출근 시간과 겹쳐

튜브는 만원이었다.

서울의 지옥철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호텔이 있는 올드스트리트 역에서

목적지인 베이커 스트리트 역까지 가려면

다음 정거장인 뮤어 게이트 역에서

다른 라인으로 갈아타야 했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튜브 안에

커다란 여행 트렁크를 들고 타는 것이 너무 미안해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다음 튜브를 기다렸다.


맨 앞 칸이 그나마 사람이 적을 것 같아

큼지막한 트렁크를 굴리며 이동했다.




잠시 후, 튜브가 들어왔고 맨 앞문이 열렸다.

하지만 이번 열차도 지옥철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던 나는

한 명씩 나눠 타는 걸 제안했다.

"튜브가 자주 오니까 한 명씩 타기로 하자.

내가 먼저 탈게.

한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다음 역에서 만나."


커다란 트렁크를 번쩍 들어 튜브에 싣고

바쁜 런더너들 사이에 내 공간을 구겨 넣었다.


1~2분쯤 후, 다음 역에 도착했다.

트렁크 손잡이를 다시 꼭 쥐고 내릴 준비를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분명 역에 도착했는데 왜 문이 안 열릴까?'

심장은 두근거림을 넘어 쿵쾅거렸다.


그때 옆에 계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 앞칸은 안전지대 구간이에요. 다음 칸부터 열립니다."

"일행과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쩌죠?"


이미 지옥철이 된 튜브 안에서

트렁크를 끌고 이동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할아버지가 덧붙였다.


"괜찮아요. 다음 역에서 만나게 될 거예요.

일행들도 똑같이 다음 역에서 내릴 겁니다."


그 순간,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곧이어 옆자리의 여자분도 말을 보탰다.


"런던에서 헤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초조하던 감정은 따뜻한 말 한마디 덕분에

안정을 찾아갔다.




다음 역에 도착해 반대편 문이 열리자,

몇몇 승객이 내리며 내 트렁크를 들어 도와주었다.


냉정하게만 보일 것 같은 영국인들은

누군가의 어려움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흰 블라우스에 배기바지를 입고

크로스백을 멘 젊은 여성이 내 곁에 남았다.


"곧 다음 열차가 올 거예요.

일행도 여기서 내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함께 있어 드릴게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바쁜 출근길에 낯선 여행자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열차가 와도,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마 뮤어 게이트 역에서 내린 것 같아요.

한 정거장만 거슬러 가면 돼요. 이쪽이에요."


그녀와 함께

낡고 좁은 플랫폼과 계단을 지나

반대편 출입문이 열리는 곳까지 이동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한 줄기 빛처럼 나를 이끌었다.


"여기예요. 이제 한 정거장만 가면 돼요."

"정말 감사해요. 일행을 만나면 다 당신 덕분이에요."


열차에 오르며 아쉬움이 밀려왔다.

일행을 만난다는 안도감보다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저는 켈리예요. 이름이 뭐예요?"

"에밀리예요."

"에밀리, 고마워요. 당신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행운을 빌어요, 켈리."


그리고 나는 뮤어 게이트 역에서

일행과 다시 만났다.




뮤어 게이트 역까지 불과 몇 분.

가슴은 안도와 감동,

그리고 묘한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웃음과 마지막 인사가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단 몇 분, 아주 잠깐 스쳐간 순간이

내 여행의 색깔을 바꾸었다.


여행은 늘 예기치 않은 일의 연속이다.

관광지를 둘러보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이런 만남이야말로 여행의 진짜 목적을 일깨워 준다.


영국 여행을 통틀어

가장 깊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름다운 풍경도,

화려한 뮤지컬도,

위대한 문화재도 아니었다.


그건 오직 한 사람,

에밀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