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법

천천히, 다시 살아나는 중

by 보라
멈춰 서는 법을 배우니,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온갖 스트레스가 다시 쌓일 것 같아

사실 한국에 오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익숙한 거리와 언어, 직장, 사람들조차

어쩐지 또 다른 긴장의 근원이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도 결국,

'산에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가

저를 이끌었습니다.


그 마음은 참 단단했습니다.

지쳐도, 아파도, 끝내 자연을 향해 걷고 싶다는

열망 말이에요.


긴 연휴 동안

청계산, 관악산, 북한산까지

그리운 산들을 하나씩 밟으며

온몸으로 '회복'이란 말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늘도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듯

뜻밖의 시련을 내리더군요.


억지로 온 걸 몸이 알아챘는지

연휴 초반 토요일엔 갑작스러운 몸의 이상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며칠은 푹 쉬세요."

의사의 말이 유난히 차갑게 들렸습니다.


쉬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그리운 산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새벽빛이 스며드는 숲길,

젖은 흙냄새,

누군가의 숨소리와 섞여드는

나의 발자국 소리까지.




며칠간의 안정을 끝내고

오늘, 조심스레 동네 뒷산에 올랐습니다.


이른 아침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며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씩 밀어내더군요.


귀뚜라미는 귀뚜르르 울고,

비가 올 듯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새들은 쉬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여전히 노래합니다.



밤새 내린 비에 흙바닥은 촉촉했습니다.

비에 젖은 풀 냄새가 살아 있었고,

그 냄새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공기는 단 하루 만에 달라졌습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곧 가을이더군요.



산길을 오르다 고개를 들자

밤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엔 벌써 밤송이들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빈 껍데기들만 가득한 걸 보니

다람쥐들이 먼저

가을을 맞은 듯했습니다.


그 작은 생명들은

늘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니까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습니다.


숨이 조금 가빠 오면 멈추고,

심장이 두근거리면 숨을 고르고,

그렇게 제 자신과 타협하며 한 걸음씩 옮겼습니다.


이건 단순한 산행이 아니었습니다.

몸의 재활이자,

마음의 재활이었습니다.


잃었던 일상의 리듬을

다시 배우는 연습이기도 했습니다.



5봉에서 시작한 걸음이 1봉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고

나만이 조금 달라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회복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나는 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