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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Oct 31. 2023

내가 설명하면 쌤은 뭐 하는대요?

프로댓글러의 일상

벌써 7년이나 됐나.

엉성했던 육아휴직을 추슬러 본업인 수학강사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물론, 그런 나를 먼저 찾는 곳은 없다. 우리에겐 돌아가겠노라고 약속했던 직장도, 돌아오라고 기다리는 직장도 없다. 육아휴직 기간도, 복귀 시기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다시 돌아온 필드. 수학이 전부였던 아가씨 학원강사는 일상이 전투인 워킹맘이 되었고, 월급쟁이 강사 노릇 대신 원장의 길을 택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하던 프리랜서가 양어깨에 월세와 세금이라는 곰 두 마리를 얹은 자영업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본질이 일용직 노동자인 것만큼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원장이 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다.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학원의 시스템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어엿한(?) 원장이니 내 학원의 색깔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사실 그간의 학원생활은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첫 직장에서는 원장이 '강의실은 연극무대, 강사는 주연배우'라며 재미있고 튀는 강사를 원했다. 그런 끼가 먹고 죽을래도 없는 나는 그곳에서 항상 미운오리새끼였다. 학생을 때려서라도 성적을 내야 유능한 강사로 대접받는 학원, 체벌은 절대 불허하고 다만 학생이 될 때까지 남겨야 하는 학원 등 같은 학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없어지고, 시스템 안으로 열심히 들어가야 하는 날들이었다. 지나간 날들이여 안녕. 이제는 내가 정한다.


동네 상가의 한건물에만 해도 3,4개씩 있는 것이 수학학원이다. 더군다나 코딱지만 한 우리 학원은 좀 튀어야 살아남겠구나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플립러닝(Flipped Learning, 거꾸로 학습)'이었다. 무엇을 거꾸로 하는가? 한마디로 학생이 선생님처럼 설명하는 학습법이다. 이 지역 다 뒤져봐도 그렇게 수업하는 학원은 없었고, 튀어야 한다는 의도에 딱 맞는 시스템이었다.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시작된 이 선택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바야흐로 수학강사생활의 제2막이 열린 것이다.



내가 설명하면 쌤은 뭐 하는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쌤은 댓글 달아."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다. 나는 프로댓글러가 된 것이다.


수업준비의 시작은 우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영상의 개수를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이들이 보낸 영상이 10개가 넘는다. '다각형의 내각과 외각, 유형연습 오답, 전국학평 오답, 원뿔 알아보기, 최대공약수 구하는 방법...' 제목도 다양하다. 수업 전에 아이들의 영상을 확인하고 칭찬별을 주고 댓글을 달아놔야 한다.


 ‘오늘은 누구 거 먼저 들을까. 가나다 순? 먼저 오는 순?’ 내 맘대로 하면 되지만 매번 잠깐 고민한다. ‘그래, 오늘은 먼저 오는 순으로 들어 봅시다!’ 플레이를 누르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동원이 엄마인데요. 동원이가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조퇴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요. 저는 지금 회사에 있고 방금 연락받았는데, 오늘 수학학원 죽어도 못 간다고 그러네요. 저번에 결석한 것도 있고, 웬만하면 가라고 하고 싶은데 너무 완강하네요... 죄송해요...”

“네... 다쳤다니 오늘은 쉬어야겠네요... 좀 괜찮아지면 보강 잡을게요.”

동원이는 들어온 지 2주밖에 안 된 중1 남자아이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핵인싸이고, 현재 연애 중이라고 한다. “걔는 설명하라고 시켜도 절대 안 할 스타일이에요 “라고 나에게 귀띔 해준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안 하는 게 어딨어. 다 하게 될 거야.”라고 단언했지만, 참 쉽지는 않은 학생이다. 그나저나 학원에 일단 나와야지, 이렇게 자꾸 결석하면 어쩌라고... 됐고, 나는 나의 할 일을 하자.


영상 속에서 동원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각의 합은 이렇게 삼각형을 나누어 보면 180 곱하기 n-2이고, 외각의 합은 360도입니다. 정다각형의 한 내각은 n분의 180 곱하기 n-2, 한 외각은 n분의 360입니다."

아... 피드백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성질대로라면 악플을 달 것 같다. 인강은 20분이 넘는데, 설명 영상은 2분. 나머지 18분은 어디 갔니? 이 정도면 공식만 암기하겠다는 건데, 막상 공식 암기도 제대로 안되어 있는 학생이다. 이번 영상이 세 번째인데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다. 처음에는 1분도 안 되는 영상이었으니까 이것을 100% 향상이라고 해야 하나...

 “내각의 합에 대한 공식은 하나이지만, 공식을 만드는 과정은 2가지입니다. 2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도형으로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 주세요. 수학은 결론인 공식을 그냥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낌표 3개를 찍으며 이렇게라도 나의 감정을 드러낸다.


다음은 초5 과정을 공부하는 초등 4학년 보검이 영상이다. 요즘 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영상을 보내주는 친구이다. 말에 리듬이 있고, “왜냐하면”이라고 하면서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 정도 되는데, 상담 온 첫날 엄마랑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말이 서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 적응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질문을 자주 하는 이 녀석은 수학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물론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혼합계산에서 덧셈과 곱셈이 있으면 곱셈을 먼저 계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곱셈이 덧셈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귀여워 웃음이 난다. 힘이 더 세다는 표현은 인강에서 선생님이 아이들 기억 잘하라고 재미있게 설명해 준 것이다. 선생님의 표현을 모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곱셈이 힘이 더 센 이유가 무엇일까요? (힌트: 곱셈의 뜻을 생각해 보기)” 이런 댓글을 달아본다.


수업시간, 댓글을 확인한 보검이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아이들이 고민한 시간만큼 실력은 쌓이기 때문에 답을 바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답으로 향하는 길에서 기다려 주고, 함께 해주는 길잡이의 역할이 나의 일이다.


강사는 연극무대의 배우처럼 강의를 해야 한다던 그때 그 원장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수업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의 주인공은 학생들이다. 모든 아이들은 수학이라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 가는 주연배우들이다. 나는 배우들과 함께 일하는 감독 혹은 연출부 정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만들도록 디렉팅 하고, 배우들이 재능을 뽐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비한다. (물론 연습 게을리하는 배우, 공연 펑크 내는 배우도 있다.) 같은 대본도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맛이 다르듯 학생들의 설명은 매번 새롭다. 각자에 맞는 피드백을 준비하면서 고민하고,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거꾸로 내가 많이 배운다.


이제 우리 주연 배우님들 영상 확인하고 댓글 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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