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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y 22. 2024

나에게 미용실이란

● 라라크루 화요갑분(2024.05.21.)

학원 가기 전날까지 숙제를 미루는 아이들처럼, 될 수 있는 한 끝까지 미루는 몇 가지 일이 나에게도 있다. 그중 하나가 미용실 가기. 어느새 남편도 나도 머리가 덥수룩해졌고, 흰머리는 셀 수 없이 많이 올라와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어쩔 없이 미용실 예약을 위해 앱을 켰는데, 우리의 머리를 맡아주시는 부점장님의 예약이 닫혀 있었다.

'음... 그럼 다음에 갈까?' 제법 괜찮은 핑계가 생겼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냥 가자. 숙제하러 가야지.'


그런데 이건 핑계가 아니라, 같은 미용실에서 다른 (헤어디자이너) 선생님 쪽으로 간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양다리 걸친 듯 들키면 매우 곤란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예약을 할 수 없게 닫아놨는데 어쩔 수 없잖아. 5월 말까지 닫혀있는 거 보니까 휴가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미용실에 안 나오겠지.'

나 혼자 이러면서 예약을 완료했다.



며칠이 지나 오늘, 미용실 숙제하러 가는 날. 화창한 날씨가 머리 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지난 1년간 다닌 익숙한 미용실이었지만 오늘은 낯선 장소가 되어버렸다.

"머리는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뿌리 염색하고, 스타일은 같은데 길이만 짧게요."

"길이는 얼마나 짧게요? 1cm? 2cm?"

'갑자기 1cm를 모르겠네. 와, 이분 굉장히 정확한 분이시네.' 이런 속마음을 감추려고 애써 웃으며, 손가락으로 원하는 길이를 표시했다.

"요 정도요."

"네. 그럼 2cm네요. 한 달에 1cm라고 보면 되거든요. 그럼 2달 전으로. 그쵸?"

"하하하. 그런가요?"


"어머, 두상이 이쁘시네요."

"커허허." 억지웃음에 이상한 소리가 나와버렸다.  내 두상이 이쁘다니. 뒤통수가 납작해서 놀림받은 적은 있다만.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분도 어색하니까 막 던지시는구나.


"그럼 앞머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아, 아직 생각 안 하셨구나. 천천히 생각하세요. 자, 이제 안경 벗으실까요?"

이렇게 슨생님께서는 앞머리 스타일에 대한 과제를 내주시었다.



먼저 염색을 시작했는데, 염색약을 바른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안경을 벗은 상태라 핸드폰을 얼굴에 거의 붙이다시피 하며 보고 있는데,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아, 그분이다. 우리의 원래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부점장님 예약이 닫혀있더라구요. 머리는 해야겠고, 그래서..."

나의 우려대로 양다리 걸치다 들켜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이런.

"괜찮아요. 사실 저 퇴사하거든요. 그래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뵙네요. 머리 예쁘게 하고 가세요."

얼굴이 안 보여서 잘 모르겠지만, 그분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 같았다. 내가 괜찮지 않아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퇴사라니. 나는 다시 미용실 유목민이 되는 것인가. 선생님, 어디로 가시나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수선 떨 수는 없었다.

"네. 감사해요." 이렇게 괜찮은 척 인사를 했다.



다시 선생님의 시간.

"자, 샴푸실로 가실게요."

주섬주섬 일어나 샴푸실에 가 누웠는데, 얼굴을 수건으로 완전히 덮어버렸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저번 선생님은 눈만 덮어주셨는데. 샴푸질 하는 손길은 저번 선생님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다 됐습니다. 자리로 가실게요. 저쪽 첫 번째 자리예요."

"감사합니다." 나는 또 괜찮은 척,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자리가 어디라고? 아, 자리도 바뀌었구나. "여기인가요?" 난 또 웃음으로 당황함을 감추었다.

"네네, 거기요."


곧이어 커트가 시작되었다. 슥삭슥삭. 이상하다, 선생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일시적인 것이겠지 했는데, 계속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몹시 불안했다. 눈은 안 보이는데 선생님의 떨리는 손은 계속되고.

그 와중에 선생님은 엄청나게 열심히 가위질을 하셨다. 온몸을 다 사용해서 열정적으로 가위질을 하셨다.

나의 불안함은 점점 안쓰러움으로 바뀌었다.

'결과물이 좋아야 할 텐데. 이렇게 열심히 하셨는데. 제발 잘 나와라.' 어느새 응원하고 있는 내 마음.

좀 서툴러도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응원하게 된다.


드디어 안경을 쓸 시간. 왜 내 마음이 조마조마한 건지 모를 일이다.

'오, 괜찮은데. 내가 원했던 스타일이야. 길이도 적당하고.'

나는 더 이상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으니까.

"혹시 기장이 마음에 안 들면 꼭 다시 오세요. 손 봐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마음에 든다고 표현하지 못하고 쿨하게 인사하고 나왔다. 불편해도, 좋아도 표현하지 못하는 나.



미용실에서 거의 2시간 동안 나는 괜찮은 척하느라 꽤 힘들었나 보다. 오늘 수업시간 내내 갈증이 계속되어서 물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미용실은 만만치 않은 장소다. 안경을 쓰지 못하니 답답하고, 머리 해주는 선생님과 적당한 선에서 대화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게다가 오늘은 익숙했던 사람과 예상치 못한 이별을 했고, 새 사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과제까지 남게 되었다.

내 머리가 앞으로 2달은 버텨주길 바라며, 어쨌든 숙제 끝.


미용실에서 나와 남편과 산책을 했다.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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