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지 않은 사람은 나를 어른으로 봤고, 생각은 나눴지만 마음은 안 준 사람은 나를 닮고 싶다 했고, 마음까지 나눈 사람은 나를 아이로 봤다.
섬세하다는 평을 들었다. 내가 나를 얼마나 몰랐을까 생각하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평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나 보다. 라고 했더니, 사회엔 쉽게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많은데 나더러 운이 좋았다. 라고 하더라.
가족들은 본인을 내게 투영해서 봤다. 그래서 정확하지 못했고, 나는 가족에게 내 본모습을 다 보이지 않았으니 더더욱이 한 면만 투명히 보이고 다른쪽에선 아무것도 안보이는 유리였다.
친한 친구들은 나를 평가하면서까지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었고, 그저 대하던 대로 흘러가는 대로 우린 같이 흘러왔다.
그러던 중, 나라는 사람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평가를 하기 시작한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조명을 켜놓고 시작한 자존감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는 안도감을 주리만큼 슬펐다.
나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그만큼 내 옆에 솔직한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그 솔직한 누군가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건 아마도 그에게서 내 싫은 부분을 찾았기 때문이겠지.
신지민 선생님이 말했다. 넌 내면의 사다리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외부보다 높아서 자존감이 낮다고 여기는 거라고. 그렇게 본인을 채찍질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너를 보며 존경한다 할거라고. 넌 멋있는 사람일거라고. 하지만 선생님 저는 너무 불행한데요. 내면의 사다리가 높다는 말은 내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정확한 표현이었고, 선생님은 맞았다.
자존감을 외부 요인으로 규정짓는 건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고, 갉아먹을 거라는 말은 몇 번이고 내가 동의를 표하게 한다. 외부 요인은 내 의지와 달리 사라지기 쉽다. 그 요인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여지껏 나를 쥐고 흔든 외부 요인은 무엇이었나.
아마도 성취,이지 않을까? 사랑의 성취, 남들의 인정, 시험의 합격, 대학의 합격, 좋은 학점 등등을 받을 때마다 내 자존감은 안녕했으나 그렇지 못한 잔잔한 일상에서의 내 자존감은 안녕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걸 느꼈던 나는 막연하게 내 자존감을 위해 취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달 전쯤부터, 본인의 인생에서 취미가 가장 중요했던 누군가를 보며.
난 이제 처음으로 문제를 직시하는 도구를 가지게 됐다. 그 전의 나는 타고난 버티는 힘 하나로 버티는 것만 할 줄 알았는데. 문제를 쳐다보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을 버티기로 대체하려 했다. 하지만, 이게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알고 나서 기나긴 나선을 따라 내려오는 중이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