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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바냐 Jul 29. 2015

당신을 위한 연필깎이

from 오래된 내 방

   

"니는 샤파 없나?"

"샤프? 아빠가 글씨 이쁘게 쓸 때까지 샤프 쓰지 말고 연필 쓰랬는데.."

"아니. 샤프 말고, 샤파! 니 샤파 모르나?"


  1학년 15반 담임 선생님은 '읽기' 교과서의 지문을 공책에 옮겨 쓰는 숙제를 매일같이 내주셨습니다. 칸이 큼직큼직하게 나눠진 공책에 읽기책 본문을 베껴 쓰다 보면 어느새 연필심이 뭉뚝해지고, 꾹꾹 눌러쓴 글씨로 채워진 공책의 면은 작은 손길에도 옅게 번지곤 했지요.

  

  햇살이 따갑던 가을의 오후, 그날은 친구의 집에서 옮겨 쓰기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숙제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의 언니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기차모양의 연필깎이를 꺼낼 때까지도 샤파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언니가 뭉뚝하게 심이 닳은 연필 한 자루를 구멍으로 넣고 꼬리 부분에 달린 손잡이를 몇 번 돌리자, 종이에 닿으면 끝이 부러질 것만 같이 날카롭게 다듬어진 연필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니의 연필깎이를 받아 들고 필통 안의 남은 연필을 깎으면서, 처음 본 신기한 학용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연필깎이를 사 달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요.


  매일 밤 아빠는 9시 뉴스를 보시면서, 재떨이를 받쳐두고 다음날 쓸 연필 대여섯 자루를 깎아주셨습니다. 반으로 접는 검은색 면도칼이 연필을 밀어낼  때마다, 나무 속살이 떨어져 나고 그 속에 숨겨진 연필심이 드러났습니다. 면도칼을 직각으로 세워서 연필심을 뾰족하게 다듬으면 나무껍질 위로 까만 흑연가루가 소복이 쌓였지요. 재떨이를 사이에 두고 아빠 맞은편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 모습을 구경을 하고 있으면 왠지 흑연가루를 손에 찍어 맛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빠가 깎아주신 연필을 필통에 담아 넣으면 다음날 등교를 위한 책가방을 싸는 것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겨울이 오고,  아침해가 뜨는 시간이 늦춰져 갔습니다. 사위가 푸르스름한 이른 아침, 아빠는 출근길에 내 손을 잡고 학교 앞 문구사로 가서 연필깎이의 가격을 여쭤보시고는, 교문까지 바래다 주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생각보다 꽤 높은 가격에 놀라기도 했고, 드디어 고대하던 연필깎이를 갖는 날이 곧 임박했음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 새벽, 아빠 산타는 제 머리맡에 분홍색 집 모양의 샤파를 두셨지요. 


  차차 연필깎기는 책상 한 구석으로 밀려났고, 연필을 깎던 초등학생은 샤프를 쓰는 여고생으로. 또 볼펜으로 필기하는 대학생으로 자랐습니다. 15년이 흘러 먼 곳에 있는 딸에게 아빠 산타는 긴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추신을 아래와 같이 남기셨지요.


  "연필 깎는 기계와 나이 깎는 기계 교환하실 분 없으세요?"

  

  다시 10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 당신을 위한 나이깎기를 구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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