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우리 집 거실
일본 대지진 직후, 어렵사리 어린 시절 마호병이라 불렀던 진공 보온 주전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빈티지샵 주인은 앞으로 언제 다시 일본 제품이 들어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고, 상표도 떼지 않은 신품은 다시없을 물건이라며 한 푼도 깎아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3여 년간 온오프라인으로 찾아다니던 물건을 눈 앞에 둔 저로서는 애가 타 제대로 흥정도 걸어보지 못한 채 제 값을 치르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퐁퐁 거품으로 온몸을 닦아, 햇빛에 오래 바짝 말려 방 한편에 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사를 할 땐 행여나 넘어져서 보온병 속에 유리가 깨질세라 제일 먼저 아빠 차에 따로 실어 옮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이 녀석은 우리 집 거실 눈에 띄는 자리에 있습니다. 처음 집에 놀러 온 친구나 가족들이 녀석을 보면 흥미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쓰지도 않는 이걸 왜 굳이 그 돈을 주고 사서 이렇게 모셔두냐고 묻기도 합니다.
아주 희미해서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어린 날의 나른한 오후,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젊은 엄마는 동생의 천기저귀를 개고 계셨고, 그 앞에 이것과 비슷한 마호병이 하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엄마와 어린 남매 셋이서 시간을 보내던 평화로운 기억을 이 마호병은 따뜻하게 지켜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