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일기 #27
요즘 출근 준비할 때 김지윤의 지식플레이라는 유튜브를 자주 챙겨본다. 역시 똑똑한 사람을 보는 건 재밌으니까. 그중 일본 정치 전문가와 대담을 하는 영상에서 한국 사람들은 ‘거대담론’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짧게 코멘트하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그것 때문일 거라고 덧붙였다.
다른 이유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그 거대담론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담론’이란 건 본질적으로 ‘말’, 발화’, ‘이야기’의 집합체인데 그 앞에 ‘거대’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이야기의 대상, 즉 실체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이랑 군비 경쟁을 하는 것이 한국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가 거대담론이라 할 수 있다면,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내일 출근해야 하는 나와는 조금 동 떨어진 이야기다. 말하자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
뜬구름 잡는 일은 한편 현실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기약 없는 큰 말들은 소화도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말들은 나의 일상을 지탱해준다. 예를 들면 ‘바이든의 한국 방문은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줍니다’라는 말보단, ‘내일 10시에 맞춰오시면 따끈한 크로와상을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더 반가운 것처럼.
그래서 요즘 나는 말을 잘게 쪼개 보는 연습을 한다. 말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시간도 그렇다. 예전엔 시간을 통으로 쓰는 데 더 익숙했다. 1년 뒤엔 유학을 가야지, 5년 뒤에는 어떤 회사에 취업해야지,라고 말로 된 목표를 세우고 그 숫자에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더 본질적으론 5년은 내 매일을 지탱하기엔 너무 거대한 시간이라는 데서 발생했다. ‘5년 후’라는 축을 박아두고도 난 무수히 방황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그 5년 후가 재촉한다고 빨리 오는 것도 아닌데 조급증만 늘어갔다.
작은 말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운다. 세상은 생각보다 크고 나는 생각보다 작아서 눈높이를 낮추는 법을 배운다. 5년 뒤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올해에는 꼭 동유럽으로 여행을 가자, 운동은 조금 싫지만 올해 안에 락 클라이밍에 한 번은 도전을 해 보자, 이번 달엔 꼭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어야지, 등의 계획을 세운다. 더 작게는 오늘 저녁 후엔 디저트로 가을 과일인 미라벨을 먹어야지 등의 생각을 한다.
거대담론과 당위에서 멀어지자. 매일의 삶을 미시적인 것들로 채우자. 프로젝트가 잘 되고 말고는 나중 일이고 일단 출퇴근부터 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