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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Sep 28. 2021

기억에 대하여

파리일기 #5


얼마 전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항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름은 뭐에요, 어디서 왔어요, 뭐 공부해요, 파리는 마음에 드십니까, 같은 질문들에 질려가던 차였기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 됐다. 나는 비겁하게도 기꺼이 자신의 불안함을 나눠주고 보여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그런 사람에겐 나도 기꺼이 나를 내보이게 된다. 나도 완전하지 못 하고 너도 그런 것 같은데 만만치 않은 세상 같이 견뎌보면 어떨까 하는 전우애 같은 것이 든달까. 



그 친구와 내가 나눈 대화는 이런 거였다. 나는 친구에게 "넌 감정적인 편이야?" 라고 물었고 친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음 맞는 사람에겐 쉽게 정을 붙이는 편이고 때론 과거에 머물러 있는 편이라고 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래, 라고 대답했고 우리 대화는 더 길게 이어졌다. 친구는 내게 자주 우는 편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십 여 년 전 모두가 눈 퉁퉁 부을 때까지 보던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보다 잠든 위인이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아니라고 답했다.


실제로도 난 잘 울지 않는다. 내가 우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엄마와 아빠의 자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강아지들을 볼 때다. 엄마, 아빠는 내 아픈 손가락이다. 완벽한 자식도 못 되면서 이런 말은 좀 허세스러운가.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들은 참 그래,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라 완벽하지 못 할 걸 알면서도 자식들 앞에선 안 그런척 해야 하고, 자식들은 그걸 알 나이 정도가 되면 잘 해보려고 하는데 그게 항상 어긋나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다고. 그러다 문득 엄마, 아빠의 자는 모습을 보면 모든 무장이 해제된 사람 그 자체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그럼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였다. 친구는 이해한다고 답했다.



내 인생의 기억은 하나의 이어진 띠보단 파편에 가깝다. 이십 여 년도 꽤나 긴 세월이라 다 기억나진 않고 기억나는 것마저도 지금 이 시각 나의 해석이 십분 가미된 불완전한 조각들이다. 그래도 내 기억의 주체는 나이기에 내가 내 인생을 기억하는 방식은 내 자유라 한다만, 가끔 누군가 같은 기억을 끄집어 내어 다른 얘기 내지는 해석을 던지면 놀라는 일들이 있었다. 몇 개는 쉽게 수긍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이런 생각들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 기고된 한겨레 칼럼을 보면서 하게 됐다. 불과 5일 전이 세월호 침몰 5 주년이었다. 시간 참 빠르다. 칼럼의 제목은 <생존자의 기억법> 이었다. 기억이라는 말랑한 말 뒤에 법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붙다니. 좀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칼럼 작성자였던 하재영 소설가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기억의 사전적 의미는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다시 생각해내는 것’으로 회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이 개인적이고 내밀하게 여겨지던 기억에 ‘사회’라는 개념을 더하면서 기억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사건을 기념하는 방식, 한 사회에서 과거와 현재가 결합하는 과정,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때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는 소극적 행위에서 현실에 개입하는 적극적 행위로 나아간다. 그렇게 ‘나의 기억’과 ‘우리의 기억’은 전혀 다른 층위에 놓인다.



나는 이게 좀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내 15살의 기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급기야 '구성물'이라는 이름을 선사받고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것이라면? 더 나아가서 '사회'라는 황무지에 놓여 내 기억을 더 정확하게 만들어보겠다는 정당한 '사회적' 의지를 가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면? 아니,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늘어난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기억이란 참 잔인한 것이다. 아무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이겠지만 그 기억 안에 누군가 죽었고 다쳤고 아직도 아프다면 기억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Letters to Juliet>이라는 영화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What" and "if" are the two words as non-threatening as words can be. But put them together side-by-side and they have the power to haunt you for the rest of your life: What if? What if? What if?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만약 시험을 치기 전에 그 페이지를 한 번 더 봤더라면. 이건 쉽다. 반나절이 지나면 잊을 정도. 만약 내가 더 잘 했더라면. 이건 조금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이내 잊힌다. 그러나 만약, 만약 네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 무게는 가늠할 수 없다. 함부로 말 할 수 없다. 말 해서도 안 된다.



소설 <공터에서>를 쓴 김훈 작가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고 했다. 같은 결로 이 소설에선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 아들을 둔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 속에, 베트남 전 사망자 5000명이라는 숫자와 "무공훈장", "용기", "희생" 같은 명사들에 엉겨있는 목숨들과 너무 미세하고 사소해서 차마 역사책에 실리지 못한 기억은 얼마나 될까. 시대적 소명 아래 막무가내로 뭉쳐진 기억들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전쟁이 분명한 폭력이라면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말들을, 기억들을 한 데 욱여넣고 바라지도 않는 칭찬이며 훈장이며 주는 것들은 폭력의 스펙트럼 위 어느 지점 쯤에 있을까.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무공훈장을 안겨주는 것이 어떤 의미의 위로가 될까. 혁명이나 전쟁은 누구에겐 시대의 과업이었을지 모르나 그보다 조금 작은, 안 보이는 누구에겐 "남의 나라 쌈하는데 가서 앞서서 날뛰지 말고,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다치지나 말고 돌아올" 일이였을 거다.



그래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잊으라 말하는 사람들에겐 '그 때'와 '만약에 그러지 않았더라면' 대신 지금이 있기에 그렇게 말한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리지 않는 태도는 죄악이다. 자연스러운 건 없다. 자연스럽고 편하다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건 더욱 아니다. 알지 못하는 상대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불편한 공백을 견뎌줄 수 있는 넉넉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조금 불편하고 느리게 살아도 될 것 같다. 빨리 간다고 누가 떡 하나 더 주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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