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파리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 Sep 28. 2021

갈빗대 하나 꺼내는 일

지난 파리일기 


여름엔 김영하 소설을 읽었다.



김영하를 좋아하는 만큼 책을 읽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책을 서로 선물하기로 했고, 나는 친구가 전에 부탁했던 버트랜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선물했다. 보답으로 난 <오직 두 사람>을 받았다. 사랑 얘긴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 중에 내 마음에 쿵 내려 앉은 이야기가 있어 넣는다.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제일 치명적인 말다툼"


"저에게 아빠는 모국어에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운명 같은 거에요"



이 말을 듣고 왜 마음으로 울었는지 모르겠다. 내 손에 쥔 수많은 소중한 관계들을 떠올려서였는지. 내 맘에 어린 엄마아빠와의 추억 때문이었는지. 우리 엄마아빠 아주 건강한데, 웬 청승이지, 하고 스스로를 비웃기도 했다.



엄마와 나도 언어라는 게 있다. 그건 우리가 함께 일본 여행을 하며 생겼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 이것도 사가고, 저것도 사가자, 재잘대며 얘기를 나눴다. 비행기에 다 실을 수 있을까 걱정까지 하면서. 엄마는 주물 냄비를 사가고 싶어했는데, 그걸 사면 무게가 초과될 게 분명했다. 우리는 냄비 파는 가게에 들어가선 하나하나 들어보다가 '이거 가방이에요' 하고 속여서 들어가면 어떨까' 하고 같이 웃었다. 그럼 짐으로 싣지 않고 가지고 타면 된다면서. 그 때부터 여행 내내 뭔가 무거운 걸 사고 싶을 때마다 우린 '이거 귀걸이에요 하면 어떨까', '이거 모자에요 하면 어떨까' 하면서 웃어댔다.



그건 우리 언어 같은 거였다. 엄마랑 나랑 같은 박자에 웃는 게 즐거웠다. 남이 들으면 뭘 저런 일에 다 웃는대? 하는 일들에 우린 연신 웃어댔다. 그건 나와 엄마의 언어였다.



사람을 얻고 잃는 일이 언어를 배우고 또 잃어버리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와 그녀와 쌓았던 내 언어가 지나간 시간에 박제된다는 의미다.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를 잃어간다는 것.



쿤데라의 소설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젊은 시절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의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언어와 악보를 잃는 거였다. 지나간 일들에 그토록 향수를 느끼는 촌스러운 내 성격도, 지나간 후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는 진절머리나는 내 지지부진함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두려워서 그랬다. 잃어본 적이 없어서, 포기해본 적도, 작게나마 굽혀본 적도 없어서 그랬다. 쿤데라도 남의 일이니까 저렇게 말한다. 사람이 문맥이라면 그에게서 단어 몇 개를 삭제해나가는 일이 갈빗대 하나 꺼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임을 몰라서 저렇게 말한다.



오늘은 그저 그런날이었다. 파리에 올 땐 꿈이 참 컸었는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두려워서 움츠러 들었나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거 약속이 다르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