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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10. 2024

개와 걷는 사람

 머릿속이 무겁고 몸도 찌뿌둥했다. 오토와 걷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는데 자고 있던 오토가 벌떡 일어나 펄떡펄떡 뛰며 난리를 쳤다. 빨리 나가자는 격렬한 신호였다. 이 녀석이 어떻게 내 마음을 순식간에 읽어 내는지 생각할수록 미스터리였다. 

 

 아파트를 나서자마자 오토는 회양목 울타리에 대고 오줌을 누었다. 킁킁대며 몇 걸음 더 가다가 똥을 한 무더기 싸고는 콧바람을 씩씩거리고 뒷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퍽퍽 차면서 배설물을 덮는 시늉을 했다. 뒤처리하는 나를 응시하면서 꼬리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일을 마치라는 뜻이었다. 베란다 배변 패드에 일을 볼 때 나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죄라도 진 것처럼 꼬리를 말아내리고 줄행랑을 치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오토 품종은 독일산 미니어쳐 핀셔다. 견종 백과에는 작은 몸집에도 대형견과 같은 용맹성과 침착성을 지닌 토이종의 왕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2개월 된 강아지를 처음 데려왔을 때 딸아이는 견종 명성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야 한다며 독일 오토 대제의 이름을 따서 거창한 작명을 했다.            


 오늘은 대모산을 올랐다. 이 코스는 대략 두 시간 걸리는데, 오토는 이 산길을 아주 좋아했다. 헉헉대는 나와는 달리 오토는 스포티한 미니핀답게 겅중겅중 경사 길을 뛰듯이 올랐다. 한참을 저 혼자 앞서 가다가 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할 낌새면 돌아서서 걸음을 멈추고 어서 오라는 듯이 꼬리를 치면서 기다렸다. 20여 분을 걸었을까. 숲 속 오솔길 옆 큰 바위에 이르렀다.  ‘오토 슛!’ 큰 소리로 명령했다. 오토는 기다렸다는 듯 총알처럼 튀어서 바위에 우뚝 올라섰다. 이내 알아듣고 단번에 점프에 성공한 게 너무 예뻐서 꼭 안아주고 잔등을 썩썩 문질러주니까, 녀석은 의기양양하면서 눈자위가 벌개지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집 안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주방과 거실 사이에는 30센티미터 높이의 애견용 펜스가 있다. 주방에서 음식 냄새가 풍기면 오토는 충동을 참느라고 우는 소리로 눈치만 보며 조르면서도 펜스를 뛰어넘어 보려는 시도는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밖에 나오면 이 녀석은 생판 다르게 굴었다. 팔팔한 야생성이 살아났다. 이리저리 뛰고 달리고, 이것저것 냄새를 맡고, 맛 보고, 제멋대로 배설하면서 생래적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이었다. 


 쉼터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고 있었다. 오토가 갑자기 일어나 관목 숲으로 내달아 목줄이 팽팽해졌다. 덤불 속을 들여다보니 시커먼 고양이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토는 발을 구르며 짖어댔다. 오토를 달래 멀찍이 데려가서 고양이를 관찰하게 했다. 둘은 차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에서 고양이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산길은 단독 주택이 모여 있는 운치있고 고즈넉한 동네를 지나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나를 위한 코스다. 높은 담장 밖으로 넘어온 정원수들이 드리운 그늘을 따라 내려가다가 가지 끝까지 만발한 박태기꽃을 보고 멈춰 섰다. 햇살이 꽃에 닿아 부서지니 주변은 흑백 사진 속의 배경처럼 무채색으로 멀어지고 화려한 보라색 꽃덩어리가 눈앞으로 밀려와서 순간 어찔했다. 꽃이 참 야하네, 하고 있는데, 손에서 목줄 당김이 느껴졌다. 오토가 콘크리트 길과 담 사이 작은 공터에 자리잡은 양지꽃 군락으로 들어가 이 꽃 저 꽃을 기웃대고 있었다. 개는 색맹이어도 노랑은 본다는데 그 때문일까 아니면 냄새에 끌려서일까. 나도 코를 대보았다. 흙내 섞인 풀내뿐 향기랄 건 없었다. 오토와 나는 쭈그리고 앉아 들꽃을 들여다보았다. 지름이 2센티도 안 되는 꽃잎 안에 꽃술이 소복했다. 밑동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이파리에 거친 털이 무성했다. 꽃밭에 주저앉아 오붓하게 시간을 보냈다. 얼마쯤 시간을 보낸 후에 주택가를 빠져 나오는데 골목 끝 담벽락 위에 몸을 반쯤 걸친 대형견 두 마리가 우리를 내다보며 으르렁거렸다. 오토가 놀랠까 걱정이었다. 웬걸, 오토는 그 녀석들을 쳐다보다가 나와 눈 맞추기를 거듭하더니, 무심한 듯 돌아서서 앞발을 높이 쳐들고 유유히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걸음걸이가 경쾌했다. 집 안에서는 겁쟁이인 녀석이 나를 믿고 어쩜 저리 달라질 수 있을까. 나도 슬쩍 으쓱해졌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을 보낼 때 오토는 제 이름값을 되찾는다. 자신감이 생기고 늠름해지며 에너지가 넘친다. 그런 오토와 함께 걷다 보면 나 또한 몸에 활기가 솟는 것을 느낀다. 인간과 개가 교감하면 둘 사이에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한다. 함께 걷는 시간, 오토와 나는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개와 걸으며 보낸 시간이 많았다.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고 싶을 때 모르는 골목이나 동네 야산을 개하고 돌아다니면 모험의 즐거움으로 상한 마음을 쫓아낼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를 다녀간 개들은 한결같이 나의 훌륭한 동반자였다. 


  노년에 이른 내 모습을 가끔 상상해 본다. 푸른 보리밭 사잇길을 할머니가 된 내가 개와 함께 걷는 모습이 떠오른다. 기운이 달린 나를 배려하는지 또 다른 오토는 목줄을 하지 않고도 혼자 앞서가지 않고 느긋하게 보폭 맞춰 걸어준다. 둘 다 여유롭고 평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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