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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07. 2024

문학도의 길을 가는 딸에게

 원아, 너는 요즘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영문학과 마지막 학년을 비대면 강의를 들으면서 보내고 있구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너는 나한테, 엄마, 동영상 하나 보실래요, 했지.

네가 보낸 동영상은 TV 버스킹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 유튜브 영상이었어. 그 회차 버스킹 장소는 대구 스타디움이더구나. 공연 팀과 관객석 주변으로 빙 둘러 밝혀 놓은 오렌지색 조명이 초여름 밤의 활기를 더해주었어. 관객용 수십 개의 하늘색 꼬마 삼각텐트들이 어찌나 앙증맞고 예쁘던지! 텐트 밖 사람들은 잔디에 띄엄띄엄 그려 놓은 거리 두기용 하얀 원 안에 서서 공연을 함께하더구나. 가족, 연인, 친구들은 마스크를 쓰고도 모두 흥에 겨운 모습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가수 헨리가,  ‘비바 라 비다 (Viva La Vida)!', 하고 곡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연주는 시작됐어. 헨리의 바이올린이 경쾌하게 리드하니까 크러쉬가 검은 가죽점퍼 입은 팔을 위풍스럽게 들어 올리면서 묵직한 저음으로 노래를 시작했고, 감정이 절제된 적재의 보컬이 도입부를 마무리했어. 그쯤에서 엄마는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 걸 느꼈단다. 요즘 말로 '쩐다' 라고 하면 맞을 거 같아. 연주는 점점 역동적이 되고, 관객과 가수들은 '워어어어 어어어~‘ 하고 떼창을 하면서 손뼉 치고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하나가 되었어. 하이라이트였지. 헨리 말대로, 귀에 익숙한 곡이었어. 앤섬(anthem)으로 많이 들어봤거든. 영국 밴드 '콜드 플레이‘의 곡인데 '비바 라 비다‘는 스페인어로 ' 인생이여 영원하라 ' 를 뜻하지. 웅장하면서도 신나는 곡이지. 그 공연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어.


 나는 동영상에  빠져 있는데 너는 이야기를 이어갔어.

이번 학기에 ‘영문학과 계몽주의’라는 수업을 듣고 있어요. 프랑스혁명이 영국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에세이를 읽는데 교수님이 루이 16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루이 16세는 성실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대요. 양심적이었고요. 정치도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왕으로서는 자질이 부족했어요. 결국 그는 국민들의 야유를 받으며 처형됐어요. ‘비바 라 비다’의 가사는 죽음을 눈앞에 둔 루이 16세의 심경을 상상해서 쓴 거라고 해요. 우연히 <비긴 어게인>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비바 라 비다’가 나오니까 그 가사 내용이 생각났어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한 마지막 말은, 자기는 억울하고 자기가 흘린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거였대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끝까지 비웃고 조롱했어요. 군인들은 북을 치면서 일부러 그의 말을 안 들리게 해서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만 겨우 들을 수 있었대요. 근데 왜 난 ‘비바 라 비다’를 들으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바보같이. 루이 16세는 나쁜 왕인데 잘못이 많은…….

너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멋쩍게 씩 웃으며 말을 이었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요? 금방 죽을 사람이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들어주질 못하나요? 다 사람이잖아요.

 

 네가 울먹이는 사이 얼마 전 너하고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어. 넌 취업을 계획하다가 4학년 1학기가 반쯤 지나서야 대학원에 가겠다고 결정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이거밖에 없는 거 같아요. 교수가 되고 싶어요. 문학이 재미있고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요.

- 친구들이 너 부러워하겠다. 전공을 좋아해서 공부 더 한다니까.

아뇨, 아무도요. 친구들은 내게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지 않냐고 해요. 애들은 다들 돈 벌고 싶대요. 내가 걱정된다나. 문학 전공은 취직이 어려워서 대학원 나온다고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박사 학위 받아도 교수 자리 얻는 게 진짜 어렵대요.


 네가 가려는 길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때서야 실감했어. 걱정이 되더구나. 중요한 결정 앞에서 부모로서 조언을 해줘야 하는데. 일단 취직해서 일해 보다가 나중에 다시 문학 공부를 하고 싶으면 그때 대학원에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어차피 학교로 돌아올 거라면 지금 계속 공부를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몇 년 후에 나이 들고 직장경력도 없는데 취직하고 싶어 진다면 문과대학원 학위가 무슨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오락가락하게 했어.


 너도 알다시피 역사가들은 루이 16세는 실패한 군주로 평가해. 그 인생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 리더십과 분별력이 부족해서 시대 변화를 감지 못하고 쇠락하는 국가를 구하지 못한 왕은 죄인이겠지. 하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자상하고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해. 과학, 지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시계나 가구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고 하니 성격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더라. 신체 결함 때문에 결혼하고 7년이나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못 했고, 왕위를 물려받게 됐을 때는 두려워서 눈물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어. 고의로 악행을 저지른 적은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한 정치적 결정들은 국민국가로 가는 프랑스 역사 진보의 물결에서 사형을 면할 수 없는 혐의가 될 뿐이었지.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들었어.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과 자신의 피가 프랑스 국민과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대.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에 걸맞은 삶을 살 수는 없었어. 그래도 그는 자기 뜻과 상관없이 왕권을 쥐어 주고 그에 걸맞은 능력은 허락하지 않은 신(神)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운명에 순종했어. 이런 왕의 참형에 대한 정당성 논의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분분할 수밖에 없었겠지. 혁명의 환호 속에서 그의 들리지 않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했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거야. 단두대에 서 죽음을 기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낮은 존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 말이야.


 네가 문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니까 문득 천문학자들이 하는 일이 생각나네. 그 사람들은 수백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계속 관찰해. 그러다가 미세한 별빛 차이도 놓치지 않고 가려내어 새 떠돌이별의 탄생을 확인하지. 별의 색, 크기, 성분, 궤도 같은 것들을 알아내고 근사한 이름도 붙여주면서 우리에게 낯선 존재를 인식시켜 주는 일을 해. 문학가들도 천문학자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세계가 잊어버린 하찮은 한 인간의 삶의 빛나는 순간을 발견해서 깊이 들여다보고 그의 가려진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주는 일을 하니까. 그 대상과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나 역사적 평가를 넘어서서 작품을 통해 한 인물의 실존을 증명해 주는 일에 인생을 거는 거지.


 <비긴 어게인> 동영상은 역동적인 연주와 합창이었지만, 노래 가사는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의 절망의 시였고, 너는 거기서 그의 인생에 감추어진 순간들을 상상하고 공감해서 슬픔을 느꼈던 걸 거야. 오늘 그런 너를 보면서 엄마는 네 진로에 대해서 염려했던 마음이 좀 편해지고 정리가 됐어. 버려진 존재의 삶의 이면에 둔감하지 않고 그 미약한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눈물을 흘린 성정이 곧 문학의 길을 갈 수 있는 재능이라고 생각하거든. 좋아하는 일에 재능도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자기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찬찬히 떠올려 봤어. 그 사람들은 세상의 평판을 따라 인생의 방향을 정한 게 아니었어. 처음엔 그랬다 해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 길로 방향을 바꿔서 나아간 사람들이야. 너의 진로에 대해 주변에서 하는 이런저런 말들 때문에 불안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모습 그대로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는 길 자체가 너의 비전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건 타이틀도 아니고 업적 자체도 아닐 거야. 네가 택한 여정에서 느끼고, 이르고, 만나는 모든 것들을 통과하며 성장하는 너. 그게 네 비전이 되면 네 인생은 바르게 가는 길이 될 거야. 그 길을 온전히 네가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좋은 출발이지 않니.


 아, 한 가지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너도 알지. 네 엄마가 중년의 나이에 문학을 취미 삼겠다고 맘먹은 거. 그래서 딸이 문학도 대학원생이 될 거라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나려고 하거든. 네 공부를 열렬히 응원하겠다고 엄마가 약속할 테니 공부하다가 우리 엄마에게 도움 되겠다, 싶은 거 있으면 공유 좀 많이 부탁할게!


                                                          너를 항상 응원하는 엄마가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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