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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25. 2024

그리운 나의 집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났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아버지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부엌에서 마당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포도 넝쿨 아래 밝은 얼굴로 서 있었다. 와락 아버지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꿈속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단독주택이었다. 신기한 것은 꿈속에 나온 집은 한결같이 어린 시절에 살던 그 집이라는 것이다. 꿈에서는 남편과 아이들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일이 가까워서 꿈을 꾸었을까? 아버지를 추억의 집에서 만나서인지 잠이 깬 후에도 잘 계시는 거 같아 마음이 놓였다.  


 1960년대 후반, 아버지는 녹번동에 방 세 칸짜리 집을 마련했다. 할아버지는 막내인 아버지가 결혼도 하기 전 집을 장만하자 매우 기특해하였으나 어느 해인가 상경하여 경사 심한 골목 끝 북향집을 보고는 아들의 안목을 못내 아쉬워했다 한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냈고 삼남매를 낳았다.  


 잔디를 깐 앞마당에는 라일락, 개나리, 목련, 황매화, 영산홍, 주목 등을 심었다. 회양목 울타리 사이 오솔길은 아이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였다. 나와 동생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집과 마당과 뒤란을 뱅글뱅글 돌며 잡기 놀이를 했다. 


 뒷담 옆에 깊은 우물이 있었다. 여름에는 물을 길어 올려 수박을 담가 먹기도 하고 등목으로 무더위를 물리쳤다. 동네에 우리집 말고 그렇게 깊은 우물이 있는 집은 없었다. 아버지는 우물 뚜껑을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 덮고 그 위에 벽돌을 얹어두었지만, 나는 몰래 뚜껑을 열고 우물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우물 속에서부터 퀴퀴하고 서늘한 공기가 솟아올랐다. 수면에 반사된 햇빛은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황홀한 시간은 잠시, 우물 안쪽 벽에 붙어사는 살집 통통한 꼽등이들이 후다닥 움직이는 통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야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어김없이 우물을 나온 그것들이 괴물처럼 커져서 내 방까지 쳐들어오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뒤란 축대 밑에 광이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 햇마늘 다발이나 감자 상자 등을 보관해 두었다. 광 속이 궁금해 문을 열었다가 징그럽게 큰 쥐나 앙칼지게 울어대는 길고양이와 맞닥뜨려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나중에 광은 보일러실로 바뀌었는데, 어느 겨울 몹시 추운 날 아침 강아지가 그 안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은 채 발견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겪은 죽음이었다. 


 아버지는 마당 한쪽으로 포도 넝쿨을 올렸다. 포도 수확 철에는 가족의 행사가 열렸다. 아버지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따주는 탐스러운 포도를 삼남매가 줄서서 한 송이씩 받아 광주리로 옮기는 일은 즐겁고도 괴로운 놀이였다. 포도 넝쿨에서 가끔 떨어지는 깨벌레는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놀이감이 되었다. 나중에 그것이 박각시나방 유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른 검지만큼 굵고 매끈한 초록색 몸통에 노란색 사선 무늬가 예쁘장했다. 동생들은 호기심으로 막대기로 굴리고, 뒤집고, 눌러보고, 들었다 놓았다 하는 등 못 살게 굴었다. 짓궂은 장난에 벌레가 죽으면 정성스레 모레 봉분을 만들어 포도 몇 알을 늘어놓고는 나란히 절을 올렸다. 아버지는 포도나무 아래에 평상을 짜 놓았다. 고무 대야를 놓고 신나게 물놀이를 한 날은 모기장 안에 모기향을 피우고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며 뒹굴다 잠이 들었다. 


 어느 해 봄이었다. 아버지는 2층 올리는 공사를 했다. 방 하나와 마루를 만드는 공사였다. 인부 아저씨들이 등짐을 지고 간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엄마와 이모들은 앞마당에서 아저씨들을 위해 새참 국수를 삶고 있었다. 우리는 뛰어놀면서 힐끔힐끔 엄마가 부르기를 고대하였다. 라일락 향이 뜰에 그윽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던 그날이 축제의 하루처럼 환하게 떠오른다. 


 2층을 올리고 나서 장독대가 생겼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이 꽤 넓어서 엄마는 각종 장독들을 올려다 놓고 살림을 했다. 간장독 뒤 모퉁이는 나의 아지트였는데 그 곳에서 책을 보다가 햇살로 콘크리트 바닥이 따뜻해지면 소르르 낮잠에 빠지기도 했다. 마당 구석구석을 돌아 옥상을 오르내리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는데 개들도 덩달아 술래짓을 해서 산통을 깼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개를 키웠다. 한꺼번에 서너 마리를 키운 적도 있었다. 거기다가 고양이, 닭, 십자매, 잉꼬 등이 있었고 돌절구에는 금붕어가 한가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에는 생활의 편리와 많은 추억을 안겨주던 우리집은 겨울에는 추위를 가져와 우리를 고생시켰다. 거실에 난로를 놓고 방마다 전기장판을 깔아 겨울을 보내야 했다.  나는 2층 새 방을 차지했는데 그 방에는 동쪽으로 큰 창이 나 있었다. 햇살이 잠을 깨우면 창문을 열고 마주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후로 나는 여태껏 아파트에서 생활을 해오고 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에 자주 젖곤 한다. 아파트가 내 집이 아닌 임시 거처로 여겨졌던 것이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결핍과 부재를 느낄 때 나는 때때로 녹번동 29번지 옛집 골목을 찾아간다. 그곳엔 낯선 연립 주택이 들어서 있고 골목만이 옛 모습 그대로 나를 반겼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내 살던 집터와 골목을 바라보다 되돌아오곤 했다.      

 나의 옛집은 풍요로운 요람이자 학교였다. 그 집에서 몸과 마음이 자랐고 평생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웠으며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옛집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내 영혼을 맑게 해 주고 있다.   





<문학과 시드니> 제4호, 2024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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