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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Sep 21. 2024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박완서   

 누군가 나에게 감추었던 아픔을 표현할 때 어떻게 위로해 주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될까?  나의 숨겨 놓은 아픔을 그에게 고백함으로써 그가 동병상련으로 위로받게 해 주는 동시에 나도 속시원히 속을 털어놓은 해방감으로 위안을 받았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가 어려움을 헤쳐 나오는 방법을 찾아 내고 나만 그 현실에 남게 된다면 진심으로 그를 축복하고 의연하게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소설 속 화자 '나', 연이 엄마의 이웃에는 절름발이 딸을 가진 설희 엄마가 살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말을 나누게 된 계기는 진창길에 빠져 쩔쩔매고 있는 '나'에게 장화를 신은 그녀가 다가와 도움을 준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설희 엄마가 처녀 티가 나는 딸, 설희를 들쳐 업고 등교시키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그 모습이 조금도 센티멘털하거나 측은하게 보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눈다. 설희 엄마는 아픈 아이를 키우며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있고, 돈만 있으면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가 수술시켜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삯일까지 하는 그녀가 자신보다 조금은 더 가난하다고 짐작한다.  이제 '나'는 속말을 주고 받는 사이를 넘어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작가는 그 때의 '나'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여자들끼리의 진정한 의미의 성의 있는 위로가 무엇인가를. 그것은 오직 자기보다 좀더 불행한 경우를 목격하게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답답하고 서러웠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맥이 쑥 빠지는 듯 허전하면서도 시원했다." (p. 75)


 '나'도 설희 엄마에게 나의 아픈 비밀을 털어 놓는다.  친정 어머니 집에 얹혀 사는 고충과 월북한 오빠로 인해 가족이 겪는 고통, 그로 이해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만 그걸 들은 설희 엄마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일 뿐이다. 설희 엄마는 어느 날 불쑥 예술가 였던 남편이 미국 보험회사에 취직을 했다는 말을 하고 이민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평소 도피성 출국을 맹렬히 비판하고 어중이떠중이 모두 공항 배웅을 나가는 것을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던 '나'는 설희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공항으로 따라나선다. 아이를 데리고 설희 엄마 가버리고 난 후 그녀의 시어머니와 함께 남겨진 '나'는 틀니에 심한 동통과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간신히 집에 돌아와 틀니를 빼버린 후 잠깐의 자유를 느끼지만 친정 어머니의 넋두리 소리에 통증은 다시 시작되고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얼마나 교묘하게 스스로를 이중삼중으로 기만하고 있었나를. 


" 내 아픔은 결코 틀니에서 기인한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설희 엄마가 부러워서, 이 나라와 이 나라의 풍토가 주는 온갖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가 부러워서, 그녀에의 선망과 질투로 그렇게도 몹시 아팠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픔이 부끄러운 나머지 틀니의 아픔으로 삼으려 들었고, 나를 내리누르는 온갖 한국적인 제약의 중압감, 마침내 이 나라를 뜨는 설희 엄마와 견주어 한층 못 견디게 느껴지는 중압감조차 틀니의 중압감으로 착각하려 들었던 것이다."  (p.88)       


  '나'에게 설희 엄마는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 치부를 드러내도 부끄럽거나 억울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때때로 여유있고 담담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진흙탕 같은 현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와 달리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다른 세계로 떠날 방도를 찾았던 것이다. 


 작가는 섬세히 그려낸 '나'가 설희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 주목하여 소설을 읽으면 재미있고 더욱 와 닿는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나', 연이 엄마와 같은 입장이 된다면 그녀와 전혀 다를 것 없이 틀니의 통증으로 쩔쩔맬 것이 분명하다. 틀니를 안 했다면 대신 배가 아파 떼굴떼굴 뒹굴고 있겠지.     



문학동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수록 작품 발표 시기 1971. 3 ~ 1975. 6)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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