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올라 온 한강 고라니 클럽 겨울 산책 공지를 확인하고 참여 신청을 했다.
한강 고라니 클럽은 생명 다양성 재단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소모임의 목적은 시민들에게 도시 재야생화(Rewlilding)의 현황과 필요성을 알리고 동참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다. 참가자들은 전문가와 함께 고라니, 너구리를 비롯한 야생동물이 낸 길, 흘린 털, 똥 등 흔적을 따라다니며 도시 안의 한강변 야생의 진면목을 함께 체험한다.
2년 전 여름, 내가 겪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은 나를 이런 활동으로 이끌어 준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집 근처 탄천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걷고 싶었는데 질주하는 자전거와 조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피곤함을 느꼈다. 사람이 없는 강 쪽으로 가보려고 무성한 풀숲을 헤치면서 나아가는데 고개를 드니 갑자기 뭔가가 눈앞에 서 있었다. 가슴이 떡 벌어진 성체 고라니였다. 고라니와 나와의 거리는 불과 3, 4미터 정도였다. 우리는 둘 다 놀라 얼어붙기라도 한 듯 빤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수초가 흐르고 내가 조심스레 제 사진을 찍기 무섭게 고라니는 획 돌아서서 상류 쪽으로 사라졌다. 뜻하지 않게 커다란 야생 동물과 조우한 나는 한동안 사진을 보며 감동에 젖어 있었다. 고라니의 출몰은 곧 내가 사는 서울, 이 거대 도시가 겉보기와 달리 덩치 큰 야생 동물들이 터 잡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좋은 환경이라는 말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도시 야생’, ‘생명 다양성’ ‘도시 재야생화(리와일딩)’ 등의 키워드로 정보를 검색하고 관련 강연을 듣거나 서적을 구해 읽었다. 생명 다양성 재단도 그러는 도중에 알게 된 것이다.
겨울 산책일은 첫 눈이 온 후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이번 눈은 117년 만에 40cm가 넘는 최대 적설량을 기록한 폭설이었다. 모임 장소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강서습지. 이곳은 1999년에 생태 공원으로 지정되고 정책적으로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 하여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왔다. 20여 년 세월이 흐르니 현재와 같은 상태로 야생이 스스로 회복되어 조류는 물론이고 고라니를 비롯해 수달과 삵 같은 포유류들이 돌아 와 살고 있는 서울 시내 야생 생태 공원 중 하나가 되었다.
토요일 오전 열 시, 집결지는 강서 습지 생태공원 주차장 건너편이었다. 이 모임의 리더인 연구원님을 포함 열네 명의 사람들은 눈 속 탐험을 대비한 방한 복장을 갖추고 나타났다. 모두들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 나 같은 중년 여성 세 명, 나머지는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고 그 중에 우리말이 유창한 외국인 여성도 있었다.
연구원님은 인조털로 만든 다리 토시를 한 켤레 씩 나눠 주었다. 그걸 다리에 차고 동물처럼 풀숲을 돌아다니면 도꼬마리나 도깨비바늘 같은 동물을 매개로 화분이 되는 식물의 씨앗이 털에 붙을 것인데 그 씨앗의 양을 측정 해 보는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줄지어 습지로 이어진 나무 데크 자연 관찰로를 따라가다가 길을 벗어나 언덕을 올라갔다. 바람이 잦아들고 해가 나니 날씨는 맑고 포근했지만 눈 속에 발이 빠져 들어가 신발은 젖고 미끄러워 걷기가 쉽지 않았다. 습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중간 가지가 꺾인 나무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땅에 누운 가지들에 물까치 떼가 앉아 지저귀는 모습은 설경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행여 위험하지 않다면 쓰러진 나무들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이 생태 공원다운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7월 여름 고라니 클럽 산책 때는 버드나무 군락 습지에서 돌아다니는 붉은 발 말똥게를 여러 마리 보았다. 버드나무와 말똥게는 영양분을 주고받는 공생 관계다. 아기 고라니와도 마주쳤다. 여름에는 그랬었는데 이렇게 폭설로 덮인 겨울에는 뭘 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지 않아 오히려 눈 위에서 동물들의 움직임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흙이나 풀 위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동물들의 흔적이 눈 위에는 선명하게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앞발과 뒷발의 뾰족하고 긴 발굽이 두 개씩 겹친 발자국은 고라니의 것이었다. 발자국 뚜렷하다는 것은 고라니가 그 자리를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라니는 먹이를 찾으며 슬슬 걸어간 것 같았다. 발자취는 완만하게 휘어 있었다. 산책로 한 귀퉁이에서 고라니 배설물을 발견했다. 서리태 같이 생긴 똥 무더기 옆에는 눈을 노랗게 물들인 오줌 자국이 있었다. 연구원님은 오줌을 눈 고라니의 성별을 맞혀보라고 했다. 내가 암컷이라고 답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에 누었으니 암컷이 틀림없었다. 수컷이었으면 서서 오줌을 주변에 뿌렸을 것이다.
연구원님은 배낭에서 지퍼백에 나눠 담긴 뭔가를 잔뜩 꺼내 보여 주었다. 그가 지금까지 수집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들의 털과 똥의 표본들이었다. 고라니, 노루, 사슴의 똥은 비슷비슷해 보였는데, 사슴과 동물 중 제일 큰 엘크의 똥은 크기가 대추만했다.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인근에 산다는 엘크는 북한에서는 누렁이라고 부른다는데, 연구원님은 몽골에 갔을 때 채집해 왔다고 했다.
새 발자국들의 크기는 다양했다 이곳에 오는 새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었다. 새무리의 이동 흔적은 여덟팔자, S자, 직선들의 교차같이 보였다. 새 무리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이 그대로 나타났다. 발자국 두 개가 모인 자국이 총 총 총 총 이어지다 뚝 끊어진 건 그 지점에서 날아올랐다는 뜻이다. 뒤로 난 네 번째 발가락까지 찍힌 자국들은 까치나 멧비둘기, 직박구리 같이 나뭇가지를 잡고 앉는 새들의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스트레칭이라도 했는지 죽 뻗은 깃털의 문양이 눈 위에 문양으로 남아 있었다. 요산이 섞여 허연 액체상태의 새의 배설물을 보았는데 그 바로 옆에는 굵은 씨앗과 껍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새가 소화시키기 어려운 것을 도로 뱉어 놓은 건데 이런 것들을 티 또는 펠릿(pellet)이라고 부른다는 걸 생태 관련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언덕 너머 산책로 옆으로 오솔길이 하나 있었다. 동물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그 길 입구에서 새로운 동물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 모양이 둥근데 발톱은 찍히지 않은 것이었다. 또박또박 걸어 간 듯한 생김이었다. 발자국 주변에 갈색 똥이 있었는데 똥 속에는 털과 가는 뼈가 섞여 있었다. 연구원님은 새나 쥐를 잡아먹고 싼 삵의 배설물이라고 했다. 말로만 듣던 삵이라는 동물의 존재를 확인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살쾡이는 몸집은 작아도 생태계 최상위 맹수 포식자 아닌가. 호랑이, 표범이 다 사라진 마당에 살쾡이가 서울에서 서식한다니 다행이었다. 또 다른 네 발 짐승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그 부분의 눈이 녹아 형태가 또렷치 않았다. 발톱이 찍힌 것도 같아서 우리는 너구리나 수달 일거라고 추측했다.
강가로 향했다. 콘크리트 구조물을 없애고 20여 년 간 내버려 둔 호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1960년대에는 부산 해운대에서 해수욕을 하는 인구보다 한강 모래사장에서 강수욕을 하는 인구가 더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랬던 강변을 상상하며 내려갔다. 인공이 사라진 강변은 옛 모습 가까이 회복되어 있었다. 강가는 한적하고 물살은 잔잔했다. 하얀 모래톱은 아니었지만 진흙과 모래가 섞여 있는 강가에는 새들의 발자국과 수생 동물의 숨구멍 같은 것들이 보였다. 연구원님은 강변이 모래사장이 아니라 갯벌처럼 된 것은 서울을 흐르는 한강의 양 끝단에 잠실보와 신곡보가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신곡보의 철거 문제에 대해서 관련 지자체나 기관들, 환경 단체 간에 찬반 논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변을 따라 걸을 때 내 눈은 강물 위에 떠 있는 한 마리 이름 모를 새에 가 멈췄다. 그것은 차디찬 겨울 강에서 홀로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발장구 한 번 없이 매끄럽게 수직으로 쏙 자맥질을 한다. 나는 녀석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10초쯤 흐르고 7, 8 미터 멀어진 수면에서 나타난다. 몸집은 오리보다도 작은데 프로 다이버 급의 실력이 기특해서 녀석이 자맥질을 서너 번 더 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우리는 두 시간 반가량의 산책을 마치고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풀들이 모두 눈에 덮여 버려서 이번 다리 토시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람들은 시도해 보는 것만도 재밌었다고 했다.
겨울 산책에서 우리는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야생의 생동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또 우리는 눈 속에서 습지를 어슬렁거리며 스스로 야생이 되어 보았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갈 때 행복을 느끼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 강변을 그저 돌아다니기만 했던 그날의 산책을 즐거워했던 것이다. 야생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환경이고 우리가 살고 싶은 환경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환경을 모두 시골로 바꾸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우리와 함께 다양한 생물이 살 수 있도록 관심 갖고 그 방향으로 조금씩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 그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에게 약간의 자리를 내어 주고 그들의 천성대로 살아가도록 지켜보며 기다려 주는 것이다.
올해의 고라니 클럽 모임은 그날 겨울 산책으로 마무리 되었다. 생명 다양성 재단에서 내년에는 어떤 생태 클럽을 기획할지 궁금하다. 올해 함께 했던 사람들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