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오로 Mar 05. 2021

낳아줘서 감사하다는 말은 넣어둬

모든 건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다

    임신을 확인하던 그 날부터 고난이었다. 성인이 된 이래 열감기를 앓아본 기억이 없다. 목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 열이 난다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낮부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밤에는 39도까지 열이 올랐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코로나인가 싶어 코로나 검사도 받았으나 음성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임신테스트기에 버젓이 두 줄이 뜰 줄이야.


    임신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편해졌고, 대부분의 것들에 제약이 걸렸다. 해열제 하나 먹는 것도 전전긍긍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식단의 60% 였던 '날 음식'이 식단에서 제외되었고, 저녁시간의 99% 를 차지했던 알코올이 나의 저녁에서 사라졌다. 엽산을 먹은 뒤부터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드름 천지가 되었고, 스피드를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샤워는 씻는 시간보다 튼살크림 바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다행히 심한 입덧은 아니었으나 고생이라고 할 정도의 울렁거림이 늘 함께 했으니, 어느 날은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임신하지 않은 몸이면 좋겠다'라는 불손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내가 이만큼의 신체적 변화를 겪으면서 임신을 해야 한다는 것과 후에는 진통까지 겪을 생각을 하니 괜히 우울해졌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이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임신소식을 오롯이 기쁨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남편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제약과 불편함이 들이닥칠 때마다 실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보다 억울함이 더 컸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시금 죄책감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억울함과 죄책감이 커질수록 '아가야, 너를 건강하게 낳기 위해 내가 이렇게 참고, 견딘다. 나의 희생을 부디 잊지 말아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엄마와의 전화에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임신하니 이렇게 저렇게 힘들다 투정대는 와중에 얼굴에 여드름이 엄청 올라왔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일 수도 있으나 임신 몇 달 전부터도 조금씩 얼굴에 좁쌀처럼 여드름이 올라왔었고, 그 시기가 엽산을 먹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얼굴이 심해져서 일주일 정도 안 먹으면 다시 가라앉았다가, 그래도 임신하려면 먹어야 좋다니 다시 먹고 피부가 뒤집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가 임신을 확인하자 빼도 박도 못하게 더 많은 양의 엽산을 섭취해야 했고 내 얼굴은 날로 중학생이 되었다. 엽산 때문에 얼굴이 말이 아니라고 하니 엄마는 단칼에 내게 엽산을 그만 먹으라고 했다. 내가 내 아이 건강하게 낳으려고 죽어도 엽산을 먹는 것처럼, 엄마도 엄마 아이의 피부가 망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 모양이다. 더욱이 엄마세대는 엽산의 중요성이 별로 강조되지 않았기에 그러지 않아도 애는 건강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이다. 내가 엽산을 먹지 않는다고 해도 건강하게 나올 아이들은 결국엔 건강하게 나올 것이다. 나와 나의 언니가 그랬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드름쟁이가 되면서까지 엽산을 먹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게 됐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먹어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안 먹으면 아이에게 치명적인 결함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고자 하는 나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나는 그 여드름을 무릅쓰고 매일같이 엽산을 먹는다. 내가 꿈꾸는 통상적인 가정을 이루기 위해.


    드디어 나는 내 속에 움트는 생명의 의미에 대해 받아들이고 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아이는 나와 남편의 주도 아래 싹 틔운 존재이며, 그 이후에 후속되는 모든 과정 역시 아이가 건강하게 세상으로 나오길 바라는 나의 의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술도 커피도 마시지 않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아이를 낳고자 하는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참고 절제하는 모든 것들이 또한 아이가 아닌 나를 위해서이다. 아이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나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나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생일이 되면 부모님께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나를 이렇게 건강하게 낳아서 내가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하다는 의미를 담아서. 그러나 나는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시대에 출산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이렇게 참고 견디며 너를 낳은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가지고자 했던 우리온전한 선택이었고, 그로인해 더 행복하려는 나를 위한 일이었다고. 네가 고마울 필요도 없고, 너는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큰 기쁨이라고. 

    

    이상으로 "출산 전" 임산부의 정신승리 글이었다. 배 아파 낳고나면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을 수도 있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