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1월의 끝에서 찾은 기록의 정당성

by 김보람




갑작스레 찾아온 외할아버지 장례의 슬픔과 남은 가족들을 챙겨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오래전 약속이었기에 취소할 수 없어 강행한 겨울방학 가족 여행까지. 녹초가 되어버린 고단한 몸으로 휘청이던 2026년의 첫 달. 새해의 기쁨은 잠깐 스치고, 혹독하고 고단했던 1월이 드디어 끝이 났다.


정신없이 바빴던 한 달을 마무리하며, 나는 오늘의 작은 행복 'ㅎ'을 찾아 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닿은 곳은 요 근래 나를 가장 편안하게 보듬어주는 중문관광단지의 **'조선호텔 스타벅스'**였다. 바로 옆 동네지만 여행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호텔 탑층의 이곳은, 복잡한 현실에서 나를 잠시 도피시켜 주는 소중한 은신처다. 쾌적한 공간과 탁 트인 뷰, 익숙한 커피 향과 신간 책들에 둘러싸인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골랐다.


그러다 우연히 집어 든 책, **<내가 읽는 그림>**을 가볍게 넘기던 중 한 문장 앞에 멈춰 섰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이 문장이 근 5년 가까이 플래너를 채우고, 노션을 정리하며 기록에 매달려온 나의 시간들에 가장 완벽한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숙제로 시작해 마지못해 채우던 일기장이나 한 번도 1년을 가득 채워본 적 없던 수많은 다이어리들과 최근 5년의 기록은 달랐다. 지독할 정도로 기록에 진심이었던 나는 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라고 말하며 그 빈칸들을 집요하게 채워왔다. 그리고 이 문장을 만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기록은 단순히 흘러가는 과거를 저장해 두는 조각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견뎌낼 수 있는 에너지였다는 것을.


만약 내가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1월은 그저 '운이 없었고 힘들었던 달'로 휘발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신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 2시간이면 끝난다던 여동생의 수술이 6시간으로 길어지고, 할아버지 입관식 시간은 다가와 초조했던 그날의 수술실 앞, 장례식장에서 이어진 친정 큰아버지 부고까지. 정말 앞이 캄캄하고 억울한 마음뿐인 순간들이었다.


새해의 기쁨과 오랜만에 만난 허파언니와의 짧지만 강렬했던 제주여행, 아이들의 방학일정으로 들떴던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비보로 엄마와 내 엄마의 엄마를 돌보기 위해 내 아이들을 잠시 뒤로 미뤄야 했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강행해야 했던 경주-부산 여행에서 난생처음 겪는 분지의 혹독한 한파에 악소리가 절로 났다.


하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도 치열하게 기록을 이어갔다. 슬픈 예감과 피로가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나는 기록했고, 놓칠 수 없었던 ‘오늘의 ㅎ’ 인증으로 나를 다독였다. 집안의 낡은 물건들을 비워내며 마음의 자리를 마련했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약속한 방학 루틴을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움츠려든 몸을 친정 건식반신욕기에 맡긴 채 잠시나마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런 사소한 루틴과 기록들은 비극에 매몰되지 않게 나를 붙잡아준 최소한의 울타리였다. 힘든 와중에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던 건, 오늘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내일의 나를 살게 할 에너지가 된다는 본능적인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록을 통해 1월의 고단함과 슬픔은 다시 '소중한 기억'으로 추려졌고, 그 기억들은 다시 2월을 살아갈 단단한 근육이 되어주었다.


기록되지 않아 사라질 뻔한 나의 1월을 나는 기어이 기억 속으로 구조해 냈다. 5년 전, 쓰다 말기를 반복하던 내가 이제는 기록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1월의 그 어떤 성취보다 달콤하다.


1월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귀했다. 나는 여전히 기록으로 기억을 붙잡을 것이다. 그 기록들은 소중한 기억이 되어, 앞으로도 내가 살아갈 이유와 에너지를 끊임없이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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