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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Feb 10. 2022

말라비틀어진 마스카라


여고 동창생으로 만나 소싯적 땡땡이 좀 같이 쳐본 친구 셋이 모임을 결성한 지 수년. 

여기서 수년이라 하는 것은 역시나, 우리가 모임을 결성한 역사적인 그날이 사진처럼 그려지지만, 그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는 것. 

어제 일도 기억이 나지 않는 판국에 모임 결성 연도까지 기억하는 건 몹시 피곤하다.

이럴 줄 알고 우리 모임 이름을 0611로 했던가.

의미 있고 위트 있는 이름을 고르고 고르다 못 고른 우리의 모임 이름은 0611.  모임 결성일이었다. 


고교시절 우리는 셋이 함께 같은 반을 한적은 없지만, 번갈아가며 같은 반을 했었다.

해마다 반이 바뀌고 어울려 노는 친구들도 바뀌었지만 우리는 급식시간마다 만났고 야자시간마다 지구 과학실에 숨어들어 수많은 고민과 추억을 공유하며 여고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각자 다른 지역,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소원했던 우리는 스물이 넘어 우연히 만나 그간의 일상과 취향을 공유하다가 좀 뜬금없이 모임을 결성했다.


각자 생활이 바빠, 매년 방학마다 만나기로 약속한 우리는 얇고 긴 모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방학마다 가고 싶었던 우리 취향의 장소를 물색하고, 평소엔 하지 못하는 많은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모아 우리만의 추억을 만들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거나 용기가 나지 않는 많은 일들을 우린 방학마다 모여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우리만의 소확행을 누렸다.


2022년 올겨울방학의 목표는 '남은 인생 중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기념하는 우정사진 찍기였다.

작가가 찍어주는 사진은 부담되고 그렇다고 직접 찍자니 자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우리에게 딱인 '셀프 흑백 사진관'이 근처에 있었다. 

핸드폰 갤러리 가득 늘 아이들 사진, 남의 사진, 꽃 사진(언제부터인가 갤러리 한편에 꽃 사진이 쌓여간다)으로 가득한 서른여섯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랄까.


약속 날짜에 맞춰 예약을 하고 우리의 첫 고민은 역시나 의상.

시간도 촉박하고 너무 갖춰 입는 건 어색할 것 같아 결국 우리는 젊은이의 상징 '트레이닝복'으로 맞춰 입고 만나기로 했다.

서로 편하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나자며 "너만 이쁘게 하면 안 돼"라는 무언의 압박을 넌지시 던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화장은 좀 해야겠지? 

그러고 보니 막내 돌잔치 이후로 제대로 된 화장 해본 적이 없네. 뭐부터 발라야 하더라" 라며 촬영 날 아침 오랜만에 꺼내 든 파운데이션을 두드리는 내손 놀림은 평소보다 격했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화장이라 잘 먹지도 않고 두드릴수록 뭔가 잘못되어가는 느낌적인 느낌.

세수하고 다시 화장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아이라인을 그리고 구석에 박아두었던 '새 마스카라'를 꺼내 들었는데 마스카라가 말라비틀어져 있다.


'아니! 새건대! 왜 이래? 뭐야 뭐야, 이거 유통기한 지난 거야?'

그러고 보니 코로나로 제대로 된 화장을 안 한 지 어언 2년이 넘었다. 2년이 뭐야. 애 낳고는 풀메이크업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그럼 8년???

그래도 가끔 민낯으로 나서기 곤란한 일정들을 위해 최소한의 필수품은 예의상 준비해두었는데.

혹시 몰라 유통기한 지난 애들은 거르고 거르며 때마다 새것들을 사다가 모셔둔 건데 말이다.

맙소사!!! 어제라도 확인해볼걸 후회하긴 이미 늦었다.


사실 내가 사는 제주는 넓은듯해도 도민들의 생활 반경이 너무 좁아 집 앞 편의점만 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기 일쑤였다.

첫째 때는 아기띠 매고 소아가를 갈 때도 늘 화장하고 나가는 나를 보며 동네언니는 "애 병원 가는데 무슨 화장이냐 부지런도 하다" 했을 만큼.

그때만 해도 또래에 비해 일찍 결혼하고 출산했던 터라, 너무 프리 하게 시내를 나섰다가 친구라도 만날라치면 "야, 너 너무 편하게 다닌다야, 좀 꾸미고 다녀"라며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다 둘째 낳고는 "에라, 모르겠다. 애들 데리고 병원 가는데 화장이 뭐야, 세수라도 하면 땡큐지"로 바뀌었고, 코로나로 마스크를 끼고 다닌 후부터는 정말 선크림 바르고 눈썹 그리면 양반일 정도였으니.

아무리 오픈하지 않은 새 마스카라라고 한들, 굳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급한 마음에 굳어버린 마스카라에 스킨을 조금 묻혀가며 축 늘어진 속눈썹을 끌어올려 대충 화장을 마무리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만나자마자 너무 오랜만의 외출이고 너무 오랜만의 사진이라 포즈도 표정도 자신 없다는 말로 시작해 오늘 아침 너희들을 만나러 오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로 대결하듯 이야기를 풀어내며 우리는 어느새 여고시절 지구 과학실 땡땡이 타임으로 돌아갔다. 

어찌 보면 부끄러운 어찌 보면 참 안쓰러운 이런 사소한 일상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위로가 된다며 말라비틀어진 마스카라의 충격을 웃으며 날려버렸다.


참 고맙게도 흑백사진은 잘 먹지 않은 화장 따위 쿨하게 날려버릴 만큼 결과물이 좋았고, 우린 그날 새로 배운 '얼빡샷'에 심취해 30여분 쉬지 않고 배 찢어지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평소엔 가기 힘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애데렐라 신분을 잊지 않고 하원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의허파 지연언니가 둘째 임신 축하 선물과 함께 보내줬던 카드 멘트를 떠올렸다.


"여잔 항상 예뻐야 한단다" 


이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겠다며 현관문에 붙여두고 드나들며 봤었는데 또 잊었네.

나 그동안 나를 너무 잊고 살았나 보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처져가는 가슴과 뱃살, 점점 후덕해지는 모습에 저항할 힘도 없이 하루하루 급급하게 살았다. 

매일이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뿌듯해하다가 어느 날 정면으로 마주한 거울 앞에 초라해져 버린 나를 발견하고도 우울해할 틈 없이 또 바쁘게 나를 잊었다. 아니 잊고 싶었나 보다.


그러다 이렇게 가끔 정신이 번쩍 드는 사건이 생기면 조용히 장바구니에 마스크팩을 담고, 색조화장품을, 이 계절 유행하는 옷과 액세서리를 담았다가 꺼냈다가 반복하다 어느 날 또 장바구니 한도 초과로 전체 삭제를 누르겠지.


그래도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의 나를 사랑해줘야겠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마스크팩이라도 하나 꺼내 푸석해진 내 얼굴에 올려 봐야지.

흘러가는 세월이야 잡을 수 없겠지만, 잠시라도 내 피부에 촉촉하고 심심한 위로를 건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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