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람 Jul 22. 2021

제주. 여기서 행복할 것.

제주도시여자. 내가 사랑하게 된 제주.

시원한 여름 바닷바람이 거실 창문을 통해 집안에 스민다.

이 집에 살면서 계절마다 바람 부는 방향이 달라진다는 걸 애 둘낳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름엔 입구 방이 겨울엔 안방이 제일 따뜻하다는 것도 알고 때마다 화분 놓아두는 위치도 변경해주어야 하는 걸 새삼 느낀다.

가만 보면 참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아니 주변에 참 관심 없이 살았다.



2021년. 내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지 서른다섯 번째의 여름이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제주 토박이라고 하면 많이들 놀란다. 사투리도 거의 쓰지 않고 제주도민 특유의 느낌이 없다며 의아해하며 신기해했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열흘 이상 제주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완전 제주 토박이다.

어릴 때부터 활발하고 사교적인 편이라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해서

사투리도 많이 쓰지 않고 다양한 지역의 친구들과 교류하며 지냈어서 제주도민 특유의 느낌이 없다고 한 것 같지만 나는 나름 제주 토박이의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그런 내게 제주도시여자라는 별명이 생긴 건 얼마 전이었다.

제주도시 여자. 제주, 도시 여자가 아니라 '제주도,시여자'.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행정구역상 '시'에서만 살았어서 제주 특유의 행복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서른다섯 해의 제주가 늘 새롭고 재밌고 신기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런 나를 '도시 여자'가 따로 없다며 놀리다가 '제주도.시여자'가 되었다.


학창 시절까지는 늘 제주를 떠나고 싶었다.

내 나이 다섯 살. 외삼촌 졸업식에 가는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간 내 인생 첫 서울행.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서울 사람들의 분주함, 택시 타고 이동하는 동안 바라본 창밖의 제주엔 없는 강과 다리, 번쩍이는 높은 빌딩들이 모두 다 재밌어 보였고, 그날의 서울은 내게 로망이 됐다.

그리고 외삼촌 졸업식에서 그날 처음 만난 교수님께 서울이 너무 좋다며 대학은 꼭 서울로 오겠다며 약속했다. 제주에서 온 서울말 잘 쓰는 다섯 살 꼬맹이가 내지른 첫 다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꿈꾼 최절정의 시기는 고3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열심히 공부해서 흔히들 말하는 'in 서울'을 해야만 제주를 떠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고, 다섯 살 꼬맹이의 서울행 다짐을 실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외삼촌이 나온 그 대학에 지원해서 수시 3차 면접까지 보고 제주로 돌아와 당연히 in 서울 할 줄 알았던 나. 다른 친구들이 수능 준비로 야간 자율학습하는 시기에 나는 일찍 하교해서 엄마랑 음악회를 보러 다니고 드라이브 다니며 자유롭게 즐겼는데 수능을 3주 앞두고서야 수시 불합격 소식을 듣고 엉엉 울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나는 진짜 제주를 떠나기는 글렀구나. 계속 제주에 살아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에 그토록 서러웠다.

결국 수능을 망쳤고 성적에 맞춰 제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도 도내에서 취업을 했다.

언제나처럼 늘 이상과 다른 나의 현실이었다.


그렇게 다섯 살 때부터 늘 제주를 떠나고 싶었던 내가 제주를 사랑하게 된 건 스물다섯 살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서울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매년 제주에 여행 왔고, 올 때마다 함께 제주를 여행했다.

한 4년간은 매계 절 바뀌는 제주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즐기는 언니를 보며 참 의아했다.

아니, 눈뜨면 보이는 돌담이 뭐가 이쁘다는 거지?

아니, 매일 보는 바다가, 산의 색이 뭐가 다르다는 거지?

아니, 이 재미없고 지루한 제주가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거지?

며칠 되지 않는 여행기간 동안 제주 곳곳을 누비며 제주의 솜털 하나하나까지 느끼며 감동하는 언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 여행마다 너무 아쉽다, 제주에 살고 싶다, 노래 부르던 언니는 결국 제주에서 일 년 살기를 하게 되었고, 동네 친구가 되어 일 년 동안 제주생활 여행자가 된 언니의 눈으로 제주를 보고 느끼고 즐기며 나는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도민의 눈이 아닌 제주생활 여행자의 눈으로 제주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제주생활여행자의 눈으로 살다보니 답답하고 지루하던 제주가 이토록 즐겁고 새로울수가 없었다.

매계절 바뀌는 나무색이 좋아서 드라이브를 하고, 꽃피는 계절에 맞춰 데이트를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때는 몰랐는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하니 매시간마다 바뀌는 한라산의 색도 구름위치도 바다빛깔도 풀내음 바다내음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그런 행복으로 매일을 꿈꾼다.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너무도 고마운 매일이다.


예전에는 계절마다 꽃구경 다니고 계절 음식 찾아먹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먼저 매계 절 바뀌는 제주의 색에 감탄하고 날씨에 따라 바뀌는 제주의 향기에 취하며 꽃구경, 계절 음식 탐방을 한다.

매계 절, 매시간,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제주를 바라보는 시선과 느낌의 소중함.

나는 조금 늦게 깨달았지만, 앞으로는 늦게 깨달은 만큼 더 많이 누리고 즐기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내 아이들만큼은 나보다 조금 더 일찍 깨닫고 즐기며 살았으면 좋겠다

과거와 미래를 쫓으며 오늘을 허비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를. 우리는 오늘의 햇빛과 바람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가치가 있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