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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Aug 12. 2021

이게 보람이야.

취향. 그 뾰족함에 대하여.

취향.

지난 몇 년간 이 단어가 나를 참 많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그동안 '취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을 새롭게 만났고,

크고 작은 선택부터 일상에 녹아든 자기만의 취향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그저 부럽고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뾰족한 취향을 가지게 했을까?

그들에게는 있고 나에겐 없는 게 뭘까?

나는 왜 나만의 색이 없는 걸까? 나도 나만의 취향을 갖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자, 그 이후부터는 정말 뭘 해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늘 다양한 것에 욕심이 나고 해보고 싶고 열정은 가득한데 나에겐 없는 뚜렷한 그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나는 그들과 다른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좀 오래 가다. 아니 가지고 있다.

성별, 나이, 직업, 경제력, 태생, 학벌, 종교, 경험치 등 정말 수많은 고민을 했다.


한참을 고민하고 그들을 관찰한 결과 엔 그저 그들에겐 많고 내겐 적은 경험치라고 생각했고,

또 한참을 지낸 후에는 그들과 나의 가장 큰 차이가 '독립적인 생활,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없는 제주라는 섬에 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같이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 번이라도 제주가 아닌 곳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경험(학업, 여행, 직업 등의 이유로 제주가 아닌 곳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외롭고 힘들지만 또 어찌 보면 그래서 자유로운, 눈치 보지 않는  살고 있거나 살아봤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만의 색이 뚜렷해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주가 아닌 곳에서 열흘 이상 살아본 적이 없다.

대학 4년 동안 본가에서 한 시간 거리의 외삼촌 댁에서 자취한 것을 제외하고는 부모님을 떠나 혼자 살아본 적도 없다.

늘 가족, 친척, 지인들과의 관계와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과 많은 걸 공유해야 했고, 시내에서 장사하는 부모님과 친척들, 엄마의 활발한 사회생활 덕에 더 좁아진 지역사회에서 생각도 행동도 자유롭지 못했다.

학창 시소위 말하는 땡땡이를 치고 떡볶이라도 먹으러 가볼라치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지인들이 엄마에게 전화가 올만큼 내가 사는 지역사회는 정말 좁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사회복지를 하며, 더더욱 나보다 남을 챙기는 일상이 자연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진짜 나를 찾고 나를 표현하는 일 자체가 의미 없었다. 사회복지는 나보다 클라이언트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케어해줘야 하는 직업이었으니까

그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 나보다 남을 챙겨야 하는 일상을 살아왔, 살고 있다.


소소한 일탈도 용납되지 않는 좁고 친밀한 관계와 환경 속에서 나는 그렇게 나만의 뚜렷한 색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나는 이게 좋고 저게 싫다고 왜 말을 못 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게 내가 별 탈 없이 내가 사는 제주에서 무난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변명처럼 들릴까.


물론 모든 사람은 취향이 있고, 뚜렷한 취향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이라는 말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에게도 아직 찾지 못한 그 어떤 뚜렷한 취향이 있을 텐데 나에겐 이게 최선이었다는 말로 취향을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를 포기하 싶지는 않다.

그간 나는 자칭 타칭 개방적인 편이라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좋아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큰 거부감이 없는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딜 가도 누구와 만나도 잘 섞일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며 살아왔다.

나는 이런 내가 싫지 않았고,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장점을 내가 자꾸만 내버려 두고 내게서 뚜렷한 것만을 찾으려 했으니 이렇게 힘들었지.

뚜렷하지 않아서 어디든 잘 섞일 수 있는 나의 장점을 뒤로하고 뾰족한 것만 찾으려 했으니 이렇게 어려웠지.

모든 사람이 뚜렷하고 뾰족하면 어떡해? 그런 사람들을 잇고 섞어주는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나는 그냥 지금의 나도 좋아.

나는 늘 현재에 만족하되 안주하지 않는 삶을 꿈꾸니까.

지금에 만족하되 언젠가 뚜렷한 나의 취향을 찾는 날을 기약하며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한 나로 오늘을 살 거야. 라며 나에게 응원과 다짐을 낸 지난 7월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의 나는 또다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동안 글을 쓰고 인스타를 하며 나만의 뾰족함을 찾아 헤맸던 시간의 결과물이랄까.

브런치 작가로의 새로운 시작을 통해 나는 나만의 뾰족함을 조금은 찾은 것 같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날. 첫 글을 쓰며 '제주도시여자'라는 나만의 뾰족함을 찾았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뾰족함이지만 내가 찾은 뾰족함은 점점 더 뾰족해지거나 어느 날 또다시 새로운 뾰족함을 발견해낼지도 모르겠다.


취향의 사전적 정의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는데, 이 방향이나 경향이라는 게 꼭 한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결국 나의 자존감이라는 게 너무 낮았던 시기에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을 만나며 나 스스로를 위로할 많은 이유를 찾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한 내가 나를 다독일 수 있는 큰 무기를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냥 이게 나야. 이게 보람이야.

취향을 모르겠던 예전의 나도, 이제 조금 나의 취향을 알 것 같은 지금의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는 앞으로의 나도. 그냥 나야.


시기적으로 환경적으로 관계 속에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더 뾰족해질 수도 있는 것이 취향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취향에 대한 나의 오랜 고민과 갈등이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나는 또 많은 생각과 고민, 갈등을 겪겠지만

더 이상의 취향, 뾰족함에 대한 고민은 여기서 잠시 멈추기로 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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