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으로 가는 길

열한 살 딸아이의 진로상담

by 김보람

처서가 지난 9월이지만, 여전히 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일요일 오후.

남편과 아들은 바다로 스노클링을 떠나고, 딸과 나는 그들이 보이는 바닷가 카페 창가에 앉았다.

십여 년 전 자주 들렀던 곳인데, 없어진 줄 알았던 카페가 자리를 옮겨 여전히 대평리 바다 한쪽을 지키고 있었다.

그사이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사장님이 내려주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딸아이가 노래하듯 주문한 휘핑크림 잔뜩 올라간 아이스초코, 그리고 당근케이크를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함께 즐기는 이 시간이 참 평온했다.


창밖을 보니, 바다 위로 남편과 아들의 웃음소리가 파도에 실려왔다.

애가 둘이니, 늘 ‘애 둘 니즈’도 둘. 월간 계획을 세울 때도 각자의 바람을 다 챙기려면 진이 빠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2:2 팀 매치가 성립되곤 한다.

오늘처럼 남성팀은 바다로, 여성팀은 카페로. 신기하게도 이렇게 나누면 모두가 만족한다.


책을 읽던 딸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엄마, 나 벌써 20살 되려면 9년밖에 안 남았어. 근데 내가 잘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

순간 너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말문이 막혔다.

이제 겨우 열한 살인데 벌써 진로 고민이라니.

나는 그 나이 때 놀고먹고 자느라 바빴던 기억뿐인데, 내 아이는 벌써 자기 앞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오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꿈을 꿔온 딸. 하루에도 몇 번씩 장래희망이 바뀔 정도였으니, 얘가 정말 커서 뭐가 되려나? 싶었다.


한동안 딸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콩쿠르에 나가보니 세상에는 자신보다 훨씬 잘 치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줄넘기도 마찬가지였다. 못하던 줄넘기를 1년 가까이 연습해 밤줄까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막 시작한 어린 친구가 이단 뛰기를 척척 해내는 걸 보고는 의욕이 꺾였다고 했다.

최근에 시작한 폴댄스는 재미있지만, 그것 역시 잘할 자신이 없다며 조심스레 불안을 내비쳤다.

게다가 학원과 방과 후 수업이 빡빡하다 보니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나, 하고 싶은 걸 고민할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 좀 쉬면서 생각해보고 싶어.”

그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또래보다 순수하고 느린 듯하다가도, 이렇게 불쑥 ‘인생 2회 차’ 같은 말을 던지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딸아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진로를 꼭 스무 살 전에 정해야 하는 건 아니야. 엄마도 학창 시절, 대학생 때, 직장 다니면서, 심지어 결혼하고 나서도 하고 싶은 게 계속 바뀌었어. 좋아하는 걸 찾는 건 평생의 과제일 수도 있지. 대학도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야. 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아직 잘 모르겠다면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고민할 수 있는 울타리로써 대학이 의미가 될 수도 있어.”


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파도 위에서 웃고 있는 아빠와 동생이 있었다.

나는 커피잔을 감싸 쥔 채, 이 장면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진로 고민도, 가족의 균형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 같다.

누구는 바다에서, 누구는 카페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게 우리가 함께 배우고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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