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넥타이

by BRG

남편의 도시락과 아침으로 먹을 요거트 챙기는 걸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습니다. 불현듯 엄마가 생각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치매환자 아빠와 그런 아빠를 돌보는 엄마. 엄마는 하루하루가 힘겨울 것입니다.


해병대 출신 아빠는 요즘 목이 터져라 관등 성명을 하고 20년도 넘은 IMF 사태를 오늘의 일인 양 걱정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합니다. 아빠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중 가장 젊은 한때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체 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거리만큼이나 감이 먼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가슴에 납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비집고 들어와 기어코 그 자리를 채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도 챙겨야 합니다. 아침은 주로 토스트에 달걀 스크램블, 과일 정도인데 식빵과 달걀이 다 떨어진 것도 몰랐습니다. 어제 먹다 남은 후라이드 치킨과 김치부침개, 그리고 키위를 식탁에 올렸습니다. 조합도 엉망인 데다 아침 메뉴로도 완전 꽝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별 수 없었어요. 정말로 별수 없었습니다.


가라앉는 마음의 출처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읽던 책을 집었다가 내려놓았죠. 잠시 앉았다가 눕고 누웠다가 다시 자리를 고쳐 앉았습니다. 거실에 깔려 있는 요가 매트가 눈에 거슬려 운동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때 카톡 하나가 왔습니다.

‘OOO 집사님이 오늘 오전 10시에 소천하셨습니다.’


소천… 하셨다니. 소천도, 죽음도, 장례도 젊고 아리따운 그분께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습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환자였지만, 그분의 병색 짙은 모습을 보지 못해서인지 한 번도 저는 그분을 죽음과 연관시켜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멀리서 그분의 회복을 기도하는 자로서의 도리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말처럼 죽음은 좀처럼 통과하고 싶지 않은 문입니다. 게다가 산 사람이 죽음이란 단어와 어울릴 필요가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삶과는 도무지 용해될 수 없는 이 죽음을 누구나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아빠도, 엄마도, 남편도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분의 죽음은 너무나 아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자꾸만 조여 오는 심장에 누가 날카로운 걸로 스크래치를 낸 것 같았습니다.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잠을 청했습니다. 잠만이 나를 이런 심장이상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자고 일어났더니 다시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장례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장례식장에서 피아노를 쳐야 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남편은 필요하다면 어디서든 피아노를 칩니다. 결혼식장에서, 곧 태어날 아기를 기대하는 베이비샤워 행사에서, 그리고 장례식장에서도. 죽음은 사실 그렇게도 삶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얼마 전 옷장을 정리하다가 그의 검은색 셔츠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일이 생각났어요. 몇 장 안 되는 남편의 셔츠들 중 그나마 장례식장에서 유용한 거였는데. 그때는 언젠가 벌어질 누군가의 장례를 대비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나 봅니다. 나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으니까요.


검은색 셔츠 대신 검은색 넥타이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달려드는 죽음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언제든 빨리 바꿔 멜 수 있는 검정 넥타이 하나 준비하는 것 밖에는. 조여 오는 가슴을 붙들고 하루 만에 배송되는 걸로 카트에 담았습니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부고를 담담히 받아들일 날이 올까요. 넥타이가 준비돼 있다면 갑자기 날아온 부고에도 울지 않을 수 있는 걸까요.


적어도 검정 넥타이는 나에게 죽음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그것은 삶을 농락하듯 다른 넥타이들 사이에 버젓이 걸려 있으면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말해줄 것입니다. 그걸 볼 때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내일 검정 넥타이가 배송되면 그걸로 아픈 심장을 칭칭 감고, 눈물을 닦은 뒤, 허리를 조이려고 합니다.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