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 작가의 <급류>
정대건 작가의 급류를 읽었다.
소설 속 도담과 해솔은 고약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생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운명의 소용돌이가 아닌, 운명의 급류에 휩싸여 흠뻑 젖은 채 살아가는 도담.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상처를 잊기 위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자연스레 술을 가까이하게 된 모습.
그 모습은 마치 나의 20대를 보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대체로 즐거웠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무거웠다. 직장인이 되자 그 발걸음은 집이 아닌 다른 곳을 늘 찾아 헤맸다.
처음 맛본 사회생활은 달기보다는 썼고, 어디에도 마음 기댈 곳이 없었던 나는 결국 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성실한 직장인, 밤에는 성실한 주정뱅이였다. 그렇게 술에 빠져 살았지만 직장은 빠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그 선을 넘으면 나는 진짜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불안한 젊음이라면, 나는 되도록 빨리 늙어 버리고만 싶었다.
실제 삶에서 우리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극 중 등장인물은 존재 이유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나는 이야기가 좋아.
‘급류’ 109쪽 발췌
그랬다. 나는 술에 절어 살면서도 틈틈이 독서를 했다. 주로 소설을 읽었다. 언제나 삶의 이유를 찾아내는 책 속 주인공들이 부러웠다. 나도 그들처럼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이 사람은 이런 이유로 살고, 저 사람은 저런 이유로 살고… 나는 왜 사는 걸까?’
그렇게 책을 읽고 나면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나는 왜 태어났는지,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지,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건지.
내 안에 갇히고만 질문들은 갈고리가 되어 자꾸만 마음을 할퀴었다. 상처 난 마음에 갇혀 살아가느라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돌아보거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급류’를 읽으며 나의 생각은 어느새 물길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아니, 바다를 무서워한다.
이 나이 먹도록 바닷물에 몸을 담가본 횟수가 다섯 손가락을 채 접지 못한다.
멀리, 때로는 가까이에서 하염없이 넋 놓고 바라보는 바다는 참 좋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바다 물결 위 반짝이는 윤슬도 정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바다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싫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록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적시고 나면 까슬한 모래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번거로운 일마저 생겨버린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모두 불편하기만 하다.
바다에 대한 나의 감정은 또 다른 것에 대한 감정과 꼭 닮아 있었다.
바로 사람.
한때 나는 사람을 좋아했었다. 혼자인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항상 사람들과 어울렸었다. 밀물 같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파도 같은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마치 썰물처럼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사람들에 푹 빠져 지냈던 예전이 그립지는 않다. 온갖 소문과 가십에 휘말려 모래처럼 덕지덕지 붙어버리는 오해들에 나는 지쳐버렸다. 결국 시끄러운 파도와 까슬한 모래로부터 나를 구해준 것은 결혼이었다.
하지만 바다와 멀어졌다고 해서 내 안의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멀어진 대신 나는 ‘나’라는 더 깊은 바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의 모습을 가진 내가 되기까지 나는 어떻게 흘러왔는가, 거슬러 가본 그 물길의 끝은 나의 어린 시절에 닿아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온통 자신들의 감정의 급류에 휘말린 채로 살았다. 어렸던 나는 힘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젖어버린 마음은 아직까지도 마르지 못했다. 가끔씩 떠오르는 부모님의 모습은 대체로 격렬한 싸움의 장면들이고, 그럴 때면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기억으로 목이 따끔거리기도 한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급류 속에 한 발을 담근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나도 이 질긴 급류에서 벗어나 마른땅에 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