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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BR Aug 03. 2020

당신의 쉼표는 몇 개입니까

[이대리 통신] 이대리의 PR일기 : 슬기로운 주말 생활 - 당신의 쉼표는  개입니까




주말에 뭐하세요?



금요일 점심시간, 안부처럼 마주 앉은 서로에게 흔히들 묻게 되는 질문.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들 눈동자를 굴리며 그제야 생각한다. 그러게, 나 이번 주말에 뭐하지. 다시 월요일을 맞이할 힘이 필요한 직장인인 우리에게, 주말은 보석과도 같다.


‘월화수목금퉬’이라는 말이 있다. 토, 일은 ‘퉬’이라고 합쳐 불러야 될 것 같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마치 스트레스받는 이대리 책상 위의 초콜릿, 통장을 아찔하게 살짝 터치하고 지나가는 월급과도 같다. 이번 주만큼은 나도 당당히 주말에 떠나게 된 한 여름의 장마 여행에 대해 자랑할 수 있었는데. 꼭 이럴 땐 아무도 안 물어본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써보기로 한다. 나의 짧지만 강렬했던 폭풍 속 작업실에 대해.  





여행의 이유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여행길에 오른다. 하고 있던 일이 끝날 때마다 나만의 리추얼 타임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과열된 머리를 식히거나 뭔지 모를 공허함을 채우러 가는 사람. 나는 후자의 경우였다. 폭탄이 되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과열된 머리, 진이 빠진 듯 허한 마음. 비우고 채우는 마음의 라인 정리가 필요했다. 금요일 오후 6시, 유난히 스피드 하게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직원들의 신난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곡차곡 나의 주말을 위한 짐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기차역… 이 아닌 분당선 환승으로 이 여행의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 중 가장 뿌듯한 일 중 하나는 나만 알고 싶은 숙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빗소리가 너무도 예쁜 새벽, 낯선 지역에 있는 한 옥탑방 작업실. 탁 트인 느낌을 주는 질 좋은 나무 탁자 위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타각 타각’ 글을 쓰는 기분이 꽤나 근사하다. 이럴 땐 내가 마치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큼지막한 머그잔에 듬뿍 채워둔 커피가 식는 줄 도 모른 채 글쓰기에 몰입한 프로 작가라도 된 듯한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첫 느낌부터 그런 기분 좋은 곳이었다. 늘 꿈꿔오던 나의 완벽한 취향이 반영된 공간.  


이 여행은 몹시 지쳐있던 나를 위한 그녀의 기획이었다. 처음 가까운 친구인 S에게 이 여행을 제안받았을 땐 어떤 시간이 될지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힐링 여행을… 수원 영통에서? 바다도 없고 산도 없고, 기차 여행도 아닌. 서울 지하철에서 조금만 더 꾸벅 졸면 충분히 갈 수 있는 도심 속 평범해 보이는 주택가에서? 하지만 내가 4년간 옆에서 지켜봐 온 그녀의 센스와 기획력을 믿었다. 가타부타하지 않고 불금의 퇴근길, 이 소중한 주말을 온전히 내맡기며 지하철에 몸을 싣게 된 이유다. 우려와 달리 기대 이상의 충족감을 채워줬던 이 곳에서, 나도 언젠가 이런 나만의 공간을 꾸리기 위해서라도 열정을 불살라야겠다는 작심 3초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때는 2주 전 밤 11시. 야근 후 퇴근길 S에게 전화한 나는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한동안 눈물이 나오지 않아 안구 건조증인가 아님 설마 멘털이 강해 진건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눈물을 쏟게 될 줄이야. 차라리 시원했다. 나의 심신은 지쳐 있었다. 2주 동안 빠듯한 실무를 겨우겨우 털어내며 2개의 제안서 작업을 했다. ‘대리’라는 어정쩡한 직급은 위에서 아래서 골고루 미운 사람 되기 최적의 위치였다. 늘 고달프고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하필 그 날은 내가 메인을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투입돼 어시스던트 해주던 첫 인턴 친구에 대한 업무 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차라리 평가받는 입장의 마음이 더 편했던 거였군! 내 책상으로 돌아와 턱을 괴며 무언가 울컥하고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적으로는 참 귀여워했던 친구였지만 일은 일이었으니까. 그 날 그 친구의 실수를 호되게 호통치고 집으로 보내 버린 후 아픈 마음을 달랠 겨를도 없었다. 눈 앞에 쌓인 일들을 어찌어찌 억지로 해치우고 퇴근길 문득 생각났던 친구를 향해 콜버튼을 눌렀다. 억눌렀던 마음은 그때가 언제가 됐건 스멀스멀 올라오기 마련이다. 휴대폰 너머로 서글프게 흐느끼는 내 울음을 가만히 달래주던 친구는 엄청난 추진력으로 지금의 숙소를 결제했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말하기에도 입 아픈 불꽃같은 2주가 흘렀다.  


읽고 싶었던 책 실컷 읽고 써야 할 글도 쓰고 와인이나 맘껏 마시다 오자, 하며 별 기대 없이 어둑한 계단을 오르자 범상치 않은 느낌의 공간이 열렸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화가이자 종합 예술가로 활동 중인 호스트의 취향과 정성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는 침실, 옥탑의 작업실 공간,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달달한 썸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듯한 것 야외 테라스, 전 세계 곳곳에서 넘어온 아름다운 찻잔, 티팟들과 향기로운 드립 커피를 내릴 수 있는 그라인더... 내가 막연히 꿈꾸던 공간 그 자체였다. 안에만 처박혀 있다가 심심하면 근처 영화관이나 찜질방이라도 가야지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1분 1초 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누릴게 많았다. 누군가의 책장을 엿보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그 사람을 가장 가깝게 알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사적인 공간. 호스트의 책장엔 내가 몰래 꽃아 두었나 싶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나뭇결 향기가 살아있는 서랍장 안엔 프랑스 자수용 실과 온갖 예술 소품이 가득했다.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클라이 막스는 무려 ‘프리즈마 색연필’을 발견했을 때다. 나는 흥분되는 마음으로 드로잉 할 종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프리즈마 색연필을 발견했는데 졸라맨이라도 그려내지 않는다는 반칙이다. 프리즈마 색연필이 주는 꾸덕꾸덕한 질감과 선명한 색채로 인해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만끽하며 이 공간 안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한 달 살기’를 꿈꿨다. 그렇게 여행이라 생각하지 않은 채로 시작했던 여행 첫날의 밤이 깊었다.





당신의 쉼표는 몇 개입니까



아침에 일어나 요가라는 것을 해본 게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나는 잠에서 덜 깬 눈을 끔뻑거리며 연거푸 개 자세를 취했다. 너무 오랜만에 늘려진 근육이 놀라진 않았으려나. 눈 앞에 펼쳐진 책 한 권 크기 만한 화면 속에서 처음 뵌 요가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와 유연한 몸놀림으로 우리의 아침잠을 깨웠다.  


아지트 401에서의 이른 아침. 우리 엄마는 아무리 얘기해도 안 믿겠지만 나는 가족이 아닌 타인들과 여행을 떠나면 평소와 180도 다르게 부지런을 떤다. 아침잠이 그리도 많은 내가 그 누구보다 일찍 깨 앉아있고 평소엔 절대 안 하던 것들을 하기 시작한다. 먹고 나자마자 생기는 설거지 감이 쌓이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고, 나뒹구는 비닐봉지나 쓰레기도 오래 보지 못한 채 싹 쓸어 분리수거에 돌입한다. 보고 배운 게 이렇게 무섭다.


우리 아빠는 엄마와 같은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엄마가 사무실에 있는 기간 동안 그 사무실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고. 늘 반짝반짝 빛이 나더라고 했다. 아빠의 초이스는 대 성공이었다. 여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방 빼고 먼지 쌓인 집을 본 적이 없다. 내 방은 늘 예외였고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속이 터져라 한 숨을 쉬시곤 했다. 내 배에서 나왔는데 어찌 저리 다르냐며 탄식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깨질세라 조심조심 아름다운 홍차 잔을 씻어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엄마! 쏘리.


전날 밤 750ml의 와인 두 병을 우아하게 나눠 마신 것 치고는 너무 건전한 아침을 시작했다. 15분 아침 요가를 마치고 요거트에 블루베리까지 알차게 말아먹고 프리즈마 색연필을 다시 꺼내 꾸덕꾸덕한 질감을 즐겼다. 





바삐 움직이던 색연필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들고 갔던 책,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의 타이틀에서 '주말'을 '쉼표'로 치환시켜 본다. 내 머릿속은 시리도록 추웠던 지난겨울, 휴직을 결심하던 날로 돌아가 머문다. 부대표님과의 면담이 떠올랐다. 


" 내 눈앞에 놓여있는 정해진 이 일만 우선 해. 다른 거 보지 마. 상처를 곱씹어 봤자 의미가 없어. 그냥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모두 털어버려. 한 달 쉬면서 잘 한번 생각해봐. 돌아와도 좋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응원할게. "


감사했다. 그 당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공황의 증세를 느꼈다. 항상 이후에 대해 고민하고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이며 살아왔지만 그땐 달랐다. 인생의 목적과 목표 따위 집어던지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얼마 전, 그 시절 썼던 일기들을 들춰봤다. 잠시 묻고 있던 쓰라린 상처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도 물론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땐 업무적으로는 물론이고 매일매일 글로 까이고 혼이 나며 나 자신의 무능과 마주해야 했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려서부터 싫어하지 않아 곧 잘 이어왔지만, 일로써 해야 하는 글쓰기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맞춤법, 띄어쓰기, 단문으로 쓰기, 핵심만 뽑아 쓰기. 내가 선택한 홍보의 길은 글쓰기가 모든 것의 기반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를 스트레스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전공자가 아닌 내가 처음 PR회사에 입사해 한 번도 안 써봤던 보도자료를 써보고 정보를 담는 카드 뉴스에 긴 내용을 정제된 문장으로 담아내야 했을 때, 나의 글에 얼마나 기본기가 없는지 절감해야 했다. 내가 휴직하기로 결심한 후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 나만의 글을 써내고 싶어서였다. 나 혼자 하는 글쓰기는 어떤 압박에서 벗어난 날 것의 느낌이었으면 했다. 굳이 어떤 정보를 전달해야 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빨간펜에 의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을 필요도 없는 글. 그저 내 마음을 담고 있고 그걸 읽고 조금이나마 같이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이미 베기 시작한 습관이란 참 무섭기도 하지. 나는 이미 맞춤법과 띄어쓰기, 단문과 문장의 구성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족한 글을 쓰고 또 써서 올렸다. 감사하게도 재밌게 공감하며 읽었다는 장문의 댓글을 읽을 때마다 벅차게 행복했다. 뭐라도 토해내 듯 닥치는 대로 써보자 시작했던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구나. 그래?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다면 당장 잘하지 못한다 해도 계속 뭐라도 써보자. 그리고 이 일이 글쓰기를 기반으로 하는 일이라면 이 고통을 배워간다는 느낌을 즐기며 버텨보자. 이것이 내가 한 달의 쉼표 티켓으로,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한 압박감을 느끼며 할 수 있었던 일의 전부였다.  





저녁이 오자 끝내주는 분위기의 작은 야외 테라스로 나가 바비큐에 와인을 실컷 즐겼다. 운 좋게도 저녁 식사가 끝나자 그제야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에는 세찬 빗줄기가 지붕을 때렸다. 자연스럽게 와인을 한 병 더 따 잔에 따랐다. 처음 마개를 따고 와인이 잔으로 또르르 떨어져 내릴 때! 딱 그 순간에만 나는 소리가 있다. 신기하게도 두 번째 와인을 따를 때부턴 그 소리가 나지 않는다. 


'토도도... 토도또 또또도~' 


내가 사랑하는 그 특유의 소리. 시원하게 내려 꽂는 세찬 빗줄기 소리가 좋다며 옥탑 테라스의 낮은 창을 열고 그 앞에 걸터 앉아 있는 친구 옆에 앉아 와인을 한 잔 더 따라 준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고, 나 역시 압박적인 상황에선 한 줄도 떠오르지 않던 카피, 장문의 글들, 그리고 이미지 기획안. 인턴 친구도 마찬가지였을텐데. 전공자라고 해서 다 알고 있는 게 아닐 텐데 그걸 왜 헤아려주지 못했을까. 미안함에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심정으로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마음은 저릿하지만 한편으론 행복하다. 이렇게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던 한 여름밤 빗줄기 속의 아늑한 옥탑 작업실. 행복했던 짧은 여행. 앞으로 나의 쉼표는 몇 개 일까. 아마도 끊임없는 쉼표를 반복하며 이렇듯 비워내고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새로운 힘을 두둑이 채워낼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수행과도 같은 일상으로 돌아오겠지. 언제나 그랬듯. 


여행이 여행인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어서이다. 쉼표 역시 마찬가지다. 늘 반복적인 패턴으로 '나'라는 사람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그래서 소중함을 잊어버린 나의 일상과 일터. 그 안에서 나의 '일'. 돌아가 한 숨 내 쉴 곳이 있기에 이 쉼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겠지. 힘내자. 아니, 힘 빼자! 시지프 신화의 페르세우스처럼 묵묵히 돌을 굴리러 돌아간다. 그리고 오늘의 감사함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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