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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BR Aug 12. 2020

어쩌다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일

남들이 나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있지?

몇 달 전이었다. 제안서에 넣을 이벤트를 기획하다가 SNS상에서 빙고 이벤트가 매우 핫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MBTI도, 비 때문에 그렇게 난리 났다던 1일 1 깡도 나는 인턴 친구들 덕에 알게 된다. 그렇게 귀를 닫고 산단 말인가. 아닌데, 나 홍보회사 다니는데 어디 가서 창피해서 말도 못 하겠다. 왜 난 항상 뒷 북인가. 그런 생각을 오래 할 시간도 없었다. 이 제안서에서 이벤트 페이지를 아름답게 완성해야 야근 샌드위치가 소화되기 전 퇴근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단체 카톡방에 공유한 빙고 PR인 버전. 아 일해야 하는데... 보자마자 빵 터졌다. 빙고 완성까지 할 시간은 없더라도 몇 개 지나칠 수 없는 공감 요소는 뽑아보고 싶었다.


 




1. 보도자료에 오타 내서 깨진 적 있다.

2. 기획기사 쓰다가 필력에 한계를 느낀다. (기획기사 아니더라도....)

3. 보도자료 쓰면서 솔직히 나도 이해 못할 때 많다. (죄송요)

4. 홍보업에 몸담은 거 후회한 적 있다. (얼마나 됐다고 벌써....)

5. 프로그램 아이디어 돌려막기 한 적 있다. (자주 그랬....)

6. 모르는 번호는 뭐다? 기자님!

7. 엠바고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적 있다. (데드라인은 늘 사람을 쫄깃하게 만들지)

8. 제안서 도형&글자 정렬에 집착한다.                                                



언뜻 봤는데 벌써 8개다. 솔직히 오타의 여왕이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나 같은 세상 최고 덜렁이가 어쩌다 이 업계에 발을 들였는지. 매일같이 나의 무능함을 마주하며 발등을 찍어댄다.  돌고 돌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느껴왔다. 나는 문득 가장 쓸데없는 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에도 운명이란 것이 있을까?



사실 쇼생크 탈출마냥 진심으로 벗어나고자 도망 또 도망쳤던 일이 이 일이다. 몇 년 전,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끊임없이 글을 써내야 한다는 것도 진절머리 나고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 내도 팀장님이 말씀하시는 그놈의 '템팅'한 광고 카피는 한 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었던 건 페이스북 광고 관리자 페이지였다. 심한 메스꺼움을 느끼며 탈옥을 시도했다. 다시는 이 비슷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나온 후 취업했던 서점 기반의 복합 문화공간에서도 나는 또다시 페이스북 광고를 돌리고 매일 같이 홍보용 카피를 뽑고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취미로 나갔던 독서모임에서조차, 어쩌다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글쓰기 분야의 모임 리더로 앉아 1년째 운영 중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했던가. 도망치려 하면 할수록 나에겐 자꾸 이 분야의 일들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 뒤로 도망을 포기하고 그냥 하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을 내려놓아서 일까. 나도 모르게 그 순간만큼은 몰입해서 하고 있다. 미치게 좋거나 편안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열 중에 아홉은 실수가 나고 깨지고 까여도 어제 아홉이었다면 오늘은 여덟로 줄여가는 식으로 조금씩 더디게 적응하고 있다.


언제나 내가 갖지 못한 것에만 안달복달했고,
내가 이미 가진 것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무엇을 하는 나'라는
상상의 프레임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빠져 살다 보면
객관적으로 나를 보는 눈을 잃기 쉬운데,
그럴 때 남들이 나에게 어떤 기회를 주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되곤 했다.


신미경 에세이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中...



문득 신미경 작가님 에세이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를 읽다가 밑줄을 두 번이나 그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무엇을 하는 나'라는 프레임에 갇혀 객관적으로 나를 보는 눈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 남들이 나에게 어떤 기회를 주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라고.


내가 되고 싶었던 나는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것과 항상 다른 모습이었다. 내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동경했다. 내가 그것에 어울리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맞는 건지도 안중에 없었다. 그저 멋있어 보이는 모습은 모두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되었고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보며 살았다. 남들이 나에게 어떤 기회를 주는지에 대해선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쩌다 시작했는데 그 방향으로 일이 술술 풀려가는 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일이 나의 운명'이라는 문장에 꾹꾹 색연필을 눌러 줄을 그어 놓았던 과거의 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운이 좋게도 참 많은 기회들을 접하며 살아왔다. 소소하게 글을 써야 하는 일, 홍보가 필요한 일, 작더라도 기획이 필요한 일 등. 내가 관심 있어하고 조금씩 깨작거렸던 분야의 많은 일들이 나에게 기회로 주어졌을 때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내 삶에 스미게 되고 굳이 목표를 정해서 하는 것이 아닌 별 다른 고민도 계산도 없이 그저 행하게 된다. 나는 그동안 꿈에 대해 생각할 때, 너무너무 좋아해야 한다거나 혹은 죽을 정도로 고생하며 이뤄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어린 나이에 자기 분야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피겨 여왕 김연아,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인터뷰 중 공통적으로 등장해 나를 벙찌게 만들었던 말이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요.
그냥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의미부여 대마왕인 나에게는 당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냥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 눈앞에 주어진 일이니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온전히 눈 앞의 일에만 집중한다는 그들의 태도.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어! 이 일은 나의 운명 이어야 해 하며 욕심부리는 순간, 즉 너무 힘을 줘버리는 순간 부담감에 짓눌리고 이미 조금도 즐길 수 없게 된다. 잘되든지 말든지 우선 묵묵히 내 눈 앞의 일들을 붙들고 하나씩 쳐내 본다.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클리핑을 하고, 빨간펜으로 피를 철철 흘릴지도 모르겠지만 한 자 한 자 집중해서 보도자료도 써보고 사람들이 어떤 콘텐츠에 매력을 느낄까, 고민하며 카드 뉴스 카피도 짜 보고 이미지 시안을 기획한다. 그리고 어딘가에 게재될 글을 쓰고 고치고 또 써본다. 묵묵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현실을 인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물론 5분 뒤에 또 딴 맘이 들겠지만. 나에겐 또 출근해야 할 내일이 있으니까. (그만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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