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주말, 서촌 여행
오늘도 바다행은 글렀다. 주말은 역시 늦잠 맛집이다.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더 자고 싶어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매주 반복되는 상황이다. 이번 토요일은 당일치기로 혼자 바다여행을 다녀와야지, 꼭 그럴 거야. 나를 5일간 굳세게 맘먹고 달리게 해주는 작은 계획이다. 매주 금요일 밤이 찾아오면 한 주 동안 돈 번다고 고생했다며 토닥토닥, 편의점에서 사둔 와인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래고 불금의 상징인 '나 혼자 산다'를 보며 깔깔댄다. 늦은 밤, 침대에 눕지만 뭔지 모르게 자기 아까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시 일어나 앉아 침대 맡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 중 한 권을 골라 잡는다. 엎드려 앉아 새벽까지 붙들고 앉아 있는다. 언제 쓰러져 잠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다음날 눈을 뜬다. 하늘의 한가운데 걸린 해가 비춰주는 눈부신 빛을 느끼며 깨닫는다. 아, 망했다. 바다여행보다 더 매력적인 스케줄은 뭐가 있을까. 그럴 땐 프로 서울로러서 이 아름다운 서울 어드메로 길을 나선다. 코스는 뻔하다. 광화문 교보문고, 혹은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을 전전하거나 늘 걷는 동네 근처 경춘선 숲길로 향한다. 3월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고,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기온. 한 주 사이로 많이 가벼워진 옷차림에서 다가오는 봄을 느낀다. 날이 조금 더 풀리면 한강에 가고 싶다.
덕수궁 돌담길 서울 시립 미술관 근처에 놓인 주인 모를 의자에 앉아 첫 번째 친구를 기다린다. 언제 끝날지 모를 재택근무로 인해 바깥나들이가 오랜만이라며 들떠 말하던 그녀를 기다리며, 모리사와 아키오의 소설 <반짝반짝 안경>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왜 책이 안 읽히는지 이제 너무 잘 알 것 같다. 매우 똑똑하고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모든 스킬, 자기 단련에 대한 자기 계발서에 빠져 이 책이 끝나면 어떤 인사이트를 머릿속에 남겨야 할지 혈안이 되어 읽었다. 잘하고 싶어 죽겠는 욕심은 어느덧 흘러넘쳐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좋아하던 책 읽기가 어느샌가 부담이 되어 다가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이 읽히지 않는 일상은 그야말로 고통이다. 거의 3주간 침대 맡의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힘없이 놔버리기 일쑤. 얼마 전 우연히 들렀던 작은 서점에서 최대한 나의 일, 자기 계발과는 관련이 없는 소설책 코너에서 골똘히 고민했다. 어떤 책이 가장 남의 일처럼 잘 읽힐까 하고. 그때 집어 든 손원평 작가의 소설 <프리즘>을 시작으로 다시금 이야기들이 읽히기 시작했다. '반짝반짝'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소설 <반짝반짝 안경>은 너무 선하고 잔잔해서 자극적인 스토리에 익숙한 이들에겐 드레싱 없이 먹는 샐러드 같은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았다. 그 안에서 주는 메시지들이 지금 내 상황에 너무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져서 묘하게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자기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서 한탄스럽다면
스스로 인생을 사랑할 수 있도록 사는 수밖에 없다.
달리 뭘 할 수 있겠나?
- 모리사와 아키오 <반짝반짝 안경> 中
소설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이다. 두 남녀 주인공을 이어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인데, 사실 이 문장보다 감정의 풍경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참 예쁜 작품이다. 마음속에 밀려드는 감정의 소리를 '쏴아 쏴아'라고 말한다던가 하는. 순간 책에서 눈에 들어 눈 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내 마음속에 가장 큰 '쏴아 쏴아 공원'을 만들어주던 덕수궁 돌담길이 눈 앞에 있었다. 첫 번째 친구가 도착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찢어진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으로 자유분방한 걸음으로 뛰어왔다. 작게 마음이 놓였다. 이해관계 얽히지 않은 진짜 친구와의 만남. 우리는 오늘 암묵적으로 아주 소박한 각자의 버킷리스트를 들고 만났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간단했다.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앉아 애프터눈 티 세트까지는 못 먹더라도 커피나 홍차에 스콘, 까눌레 같은 디저트를 그야말로 함께 '뿌시며', 담담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것. 나의 리스트는 경희궁 근처에 있는 '북한산 제빵소'라는 디저트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갑자기 편안한 숨이 쉬어졌다. 잠시 텐션이 치솟아 올랐다. 토요일이라서였는지, 내 눈 앞에 있는 달달한 디저트와 아.아 때문이었는지, 편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는지. 뭐 전부 다였겠지만. 우리는 덤덤히 요 근래 본인의 일상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회사에서 느끼고 있는 중압감과 어디서 올라오는지 모르겠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외로움, 이전 연애에서의 단상, 솔직하게 느껴지는 저 바닥 아래의 감정들까지도.
카페에서 나와 서촌까지 걸으며 혼자라면 절대 들어가 보지 않았을 소품샵을 수도 없이 들러 구경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런 작은 상점들마다 하나같이 북적거리고 있을까. 광화문, 종로... 필운동, 누하동, 통인시장... 이 지역의 분위기는 소름 돋게 좋다. 강남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동네 특유의 분위기. 여기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 좋겠다고 말하자 무의식 중에 그거 너무 재밌겠며 동조하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그거 실버타운 아니야 언니? 그리고 언니가 너무 자주 올 것 같아, 안돼."
역시, 눈치가 빠르다. 맛있는 요리들을 뚝딱 만들어내고 수많은 책과 영화와 경험담으로 다져진 내공에서 나오는 그녀의 입담 때문에 나는 그 집에 눌러앉아버릴지도 모른다.
수많은 상점들을 지키고 있는 사장님들을 뒤로한 채, '송스키친'이라는 퓨전 레스토랑에서 합류한 두 번째 친구를 만났다.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자니 묘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멋지게 살고 있는 커리어 우먼들이지만 각자의 고민을 안고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소중한 한 명 한 명의 서사.
아마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무수히 많은 불구덩이와 수많은 문장들. 각자의 우주를 짊어지고 사는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이라, 매일이 조바심 나고 조금은 벅찰 때가 많다. 반짝반짝 안경에서 보이던 장면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주말의 짧은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직장이 있고, 주말에 맛있는 빵과 커피를 사 마시며 신세한탄을 할 수 있는 돈과 여유, 공감해줄 수 있는 벗의 존재가 오늘 하루를 빛내 주었으니... 감사!
#반짝반짝빛나는 #하루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