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발표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드라마는따로 있다

by LBR
제작 발표회를 준비하는 사람들


홍보 에이전시의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보도자료나 기획기사만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머리 싸매고 제안서만 써내는 사람들도 아니다. 기자 간담회, 제작 발표회, 각종 정부 부처와 기업의 행사, 행사, 행사... 좋게 말하면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고 대놓고 말하자면 몸과 머리가 고루 바쁜 사람들이다. 나 역시 여기에 몸담고 있으니 예외는 아니다.


제안서의 늪에서 간신히 벗어나나 했더니 아주 큰 행사가 달마다 연달아 기다리고 있다. 올 해의 첫 번째 산은 다음 달 초에 있을 드라마 제작 발표회다.


쥐뿔 뭣도 몰랐던 예전에는 TV만 켜면 나오는 셀럽들을 대동한 화려한 제작 발표회 및 기자 간담회를 보며 생각했다. 우와, 멋지다. 저거 준비하면 되게 재밌겠다. 아주 당연하게도 화려한 무대 뒤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똑같은 행사들을 마주하며 생각한다. 총예산은 얼마나 들었을까. 저 제작물은 어디서 디자인했을까. 몇 주 걸렸을까. 섭외는 한 번에 다 성공했을까. 한 셀럽당 몇 번의 수정된 계약서가 오고 갔을까. 나는 이제 무대 뒤가 먼저 보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를 준비하던 중, 문득혼자서 맨 땅에 헤딩하듯 준비했던 기자 간담회가 떠올랐다. 정말 혼자였다. 매우 막막하고 앞이 깜깜했던 그때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 상황이 더 겁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금 덜했다 뿐 중압감은 더하다. 비단 이번 제작 발표회 준비뿐만이 아니었다. 또다시 상황과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나를 보며 지난 주말 깊이 탄식하며 친구에게 말했다. 나 또 조바심내고 있다고. 잘하려고 욕심내다가 능력이 안돼서 서서히 뻗어가는 중이며 이런 감정들이 몇 주째 차곡차곡 쌓여 지금 내 눈앞에 너, 그리고 초콜릿 범벅된 빵과 커피를 불러온 거라고.


요즘 이미예 작가의 '달러 구트 꿈 백화점'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한국판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느낌이 들어 과연 나 같은 현실 주의자가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싶던 찰나, 중반부쯤 되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있다. 잠들어야만 입장 가능하다는 꿈 백화점. '무의식에서만 존재하는 꿈을 정말 사고팔 수 있을까?'라는 기발한 질문에서 시작했다는 이 소설은 꿈을 만드는 사람, 파는 사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소설이다. 퇴근길, 이 말도 안 되지만 재밌는 판타지 소설을 마저 읽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다.


목적지요?
사람은 최종 목적지만 보고 달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 따위가 아니잖아요.
직접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고
가끔 브레이크를 걸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제 맛이죠.
유명 작가가 되는 게 전부가 아닌걸요.
전 시나리오를 쓰면서 사는 게 좋아요.
그러다가 해안가에 도착하든 사막에 도착하든
그건 그때 가서 납득하겠죠.

- <달러구트 꿈 백화점> 中



누가 이렇게 똑똑하냐.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현재에 집중하면 그에 걸맞은 미래가 자연스럽게 올 거라고, 이 똑똑한 작가가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또다시 나에게 떠먹여 준다. 유튜브도, 책도, 친구도, 상사도 하나같이 나에게 주입시켜준다.



그냥 일단 오늘 하루를 살아내.
현재에 충실하면 시간은 흘러가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 크고 버겁다고 생각했던
산을 넘어 서게돼.
그리고는 자신에게 이야기하게 돼.
와 나 이것도 해낸 사람이네. "

- 우리 회사 고문님 Thank you



불과 반나절 전, 오랜만에 회사에 방문하신 고문님과의 점심식사. 그 맛있는 일식 돈가스와 함께 나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조언들. 이런 희망찬 얘기로 뻔한 마무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역시 나도 한국인인가 보다. 그놈의 희망찬 마무리. 나는 내일 아침 또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며 지금의 이 감상을 똑같은 방식으로 까먹겠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저 허무맹랑한 꿈 백화점에 가서 꿈을 사고 싶다. 둘러봐야 어떤 꿈을 사고 싶은지 생각나겠지만 조금은 신나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를 준비하는 나만의 드라마를 시작하며, 이번에는 이 여정 자체를 조금은 즐겨볼 수 있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반짝반짝 안경'을 쓰고 서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