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
[오늘의 그림 한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그들이 영원한 사랑을 새기는 법
뒤 돌아봐
'뒤 돌아보지 마'가 아니라 '뒤 돌아봐'라고?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아름다운 영상미로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을 담은 그림은 이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 그녀의 남편에게 보내질 초상화를 그리러 온 여성 화가 마리앤(노에미 멜랑), 그들과 마음으로 잔잔한 우정을 함께 나누게 되는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세 여자가 둘러앉아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의 중반부로 엘로이즈와 마리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하기 전인 영화의 중반부쯤 등장한다.
그들이 지상의 문턱에 다다를 즘에
그는 에우리디케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과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보았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음유시인이자 음악가였다. 요즘 시대로 치면 팔방미인형 인기 연예인이었다. 아폴론에게 배운 리라를 통해 명수가 되었는데 그가 연주하면 맹수도 얌전해질 정도였다. 또한 그의 리라 연주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홀려 죽게 만든 마녀 세이렌들의 노래를 물리쳐 그를 아르고호의 안전을 도모한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가 너무도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자 비통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저승의 문턱으로 향하고, 저승을 다스리는 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본인의 주특기인 리라 연주를 통해 간절히 청한다. 제발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잠시라도 보게 해 달라고. 역시 뭘 하든 한 분야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그의 리라 연주 실력이 엄청나긴 했던지 하데스의 옆에서 함께 연주를 듣던 페르세포네가 크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며 하데스에게 지옥으로 납치(...)됐던 과거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한다.
" 여보! 지옥의 서약을 어기는 것이긴 하지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연이 너무 가여워요. 이번 한 번만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보내주면 어떨까요. 부탁이에요. "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에 대한 감동과 사랑하는 아내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하데스는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며 단 한 가지의 조건을 붙였다.
네가 앞장서서 지상으로 걸어 나가라.
하지만 이 곳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에우리디케를 아무리 보고 싶어도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돼.'
어쩐지 너무 쉽게 허락하더라. 하데스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의 끝도 없는 의심의 마음과 불안을. 저승의 입구가 가까워져 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등 뒤의 아내가 정말 따라오고 있는 건지 혹시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궁금했다. 사실은 정말 하데스가 그녀를 보내준 게 맞을까 하는 의심의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는 결국 의심스러운 마음과 아내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뒤를 돌아보게 되고, 죽기 전 독사에 물렸던 다리를 절며 바로 그의 뒤를 따라오던 에우리디케는 저승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만다. (한 번만 믿어보지 그랬어요) 놀란 그가 절박한 심정에 손을 내밀어 보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여기까지 책을 읽던 세 여인. '보통 사람들'의 시각으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별 이야기를 해석한 하녀 소피가 말한다.
멍청한 오르페우스,
거기서 왜 뒤를 돌아봐요?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바라본 엘로이즈와 마리앤의 시각은 역시나 다르다. 누구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안에서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마리앤은 또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한 거야.
사랑을 선택한 게 아니라
예술가(음유시인)로서의 삶을
'선택'한 거지.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건 사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거나 의심의 마음 때문도 아니고 순간 그의 본능이 예술가로서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역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예술가다운 해석이다.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오르페우스의 귀에 닿는 순간
그녀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 대목을 이어 읽던 엘로이즈 역시 마리앤 못지않은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아마 에우리디케가 말했을 거야.
'돌아보라고.'
오르페우스만의 선택이 아니었을 거라고. 에우리디케 또한 같은 선택을 했던 걸 지도 모른다고, 엘로이즈는 말한다. 이 가슴 절절한 신화를 그들만의 사랑의 해석으로 풀어냈다. 사실 영화관에서 스치듯 이 장면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큰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그들은 애절했던 사랑을 다시 만나 이어가는 것보다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한 기억으로 봉인하는 것을 '자발적 선택'함으로써 그들만의 사랑을 완성시켰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오르페우스 신화라는 견고한 액자 안에 마리앤과 엘로이즈가 만들어간 사랑 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진 한 편의 그림 같았다. 그들이 보여준 절절한 사랑은 그 간절함에 비해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성숙한 것이어서 더욱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랑 처음 해 본다면서, 어떻게 처음부터 그런 진리를 아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들은 사랑을 아름답게 완성하는 과정을 인생 2회 차 사는 사람들인 것 마냥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영화 속, 그들에게 다가온 이별의 날. 초상화 값을 지불받고 저택을 떠나는 마리앤은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도망치듯 저택의 계단을 뛰쳐 내려간다. 마리앤이 마지막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뒤따라온 엘로이즈가 말한다.
뒤 돌아봐
Turn Around. 복선 그 자체였던 오르페우스 신화 속 바로 그 순간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엘로이즈는 자발적으로 턴 어라운드를 외쳤고 마리앤 역시 '자발적 선택'으로 가만히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지막 장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들은 그렇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이별했다.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사랑을 비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너무나 믿고 소중히 여긴다. 예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이야기가 이제는 내 마음에 들어온다. 사랑하면 당연히 내 옆에 두고 봐야지, 하는 마음. 물론 지금도 내 옆에 두고 보는 사랑을 하고 싶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사랑의 못브이라고 못 박아두던 시절엔 엘로이즈와 마리앤이 완성해가는 이 사랑의 그림을, 그들이 했던 자발적 선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서로의 마음과 전 세계에 남을 신화로서 자신들의 사랑을 새겼고 엘로이즈와 마리앤은 서로에 대한 그림을 나누어 가지며 마음의 이별이 아닌 물리적 이별로서 마음속에 영원히 서로를 아로새겼다. 그렇기에 그 둘은 함께 붙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보다 외롭지 않다. 비록 물리적 공간 안에서 함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음 안에 새긴 무언가는 '나'라는 우주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까.
이 오르페우스 작품은 훌륭하군요!
보통은 그가 뒤를 돌아보기 직전이나
에우리디케의 죽음에 대해 그리는데
이 작품은 마치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요.
죽음과 운명이 갈라놓은 이별이 아닌 서로의 사랑을 영원한 순간의 조각으로 간직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 소유해야만 사랑이 아님을. 그들이 마음으로 나눠 읽었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특별한 해석.
마리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아름다운 작별 인사를 그려낸 그림 속에 그들의 사랑을 투영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소재로 한 명화는 굉장히 많지만 아무도 이 그림을 이렇게 해석한 화가는 없었다. 영화 속 마리앤의 등 뒤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작품.
' 그들의 특별한 작별 인사 '
나의 오늘의 그림은 수많은 오르페우스 명화들이 아닌, 바로 저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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