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BR Feb 12. 2022

나의 당근에 참견하지 말라

얼마 전 귀갓길, 역을 나와 걸어가려는데 젊은 남자 둘, 젊은 여자 둘이 설레는 표정으로 무언가 쇼핑백을 주고받고 있었다. 뭐지? Z세대의 신종 미팅인가, 궁금해서 봤더니 쇼핑백을 받은 쪽이 물건을 확인하고 돈 만원을 내민다. 아, 그때 깨달았다. 그 유명한 당근 거래 현장의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우리 집에 사는 나의 엄마 정숙 씨다. 그녀는 약 한 달 전부터 당근 시장에 뛰어들었다.


"당근~!"


저렇게 발랄한 알림음이라니,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나는 당근을 해본 적이 없다. 당근만이 아니다. 귀찮은 모든 것에 손대는 일이 좀처럼 없다. 하지만 우리 집 정숙 씨는 다르다. 당장 익히는 건 복잡할지라도 세상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고,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익힌다.


오늘 아침, 주방에서 남편을 위한 국을 끓이다가 거실 어딘가에서 상큼하게 울리는 당근 소리에 두 눈이 확연히 동그래진다. 들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총총걸음으로 달려간다. 어머, 이게 얼마 만에 울린 거야 하는 설레는 목소리로.


"뭐야? 어떤 거야?"

"뭔데? 얼마에 내놨는데?"

"내 당근에 다들 관심 갖지 마!"


그녀의 당근 라이프에 아빠와 나는 너무 잔소리가 많단다.  지금 한 당근님이 문의를 해온 정숙 씨의 물건은 지구본이다. 내가 몇 년 전,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건데... 잘 안 보고 자리만 차지하느니 내놓겠단다. 만 원이든 만 오천 원이든 작은 돈이어도 그것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뭔가 성취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숨길 수 없는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주방으로 복귀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다.


"내 당근 두 번째 고객이야! 아파트 앞으로 차 가지고 오겠대!"


그녀의 첫 당근은 온풍기였다. 무려 만원이었는데 첫 거래이다 보니 아빠(거기에 나까지)의 우려가 상당했다. 날 밝을 때 나가라, 그 온풍기 쓸만했던 것 같은데 꼭 팔아야겠냐 겨울에 뜨뜻하니 좋았는데.

그러면 정숙 씨는 대답했다. 안 쓴 지 4년이야. 심지어 우리 딸은 이거 있었는지도 모르잖아. 당연히 날 밝을 때 사람 많은데 나가서 만나자고 했지, 아 됐어 다들 그만 참견하시오.


역사적인 첫 당근 거래 성사일, 그 만원 없어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겠지만 그게 또 뭐라고 만면에 웃음을 띤 얼굴로 당당히 귀가한 정숙 씨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그냥 이 과정이 소소하고 재밌게 느껴진 듯했다.


"다른거 또 뭐 내놨노."

"아우 내가 알아서 해요. 나의 당근에 참견하지 마십쇼!"


그녀의 두번째 고객님이 곧 도착한다. 슬슬 나도 뭔가 내놓고 대신 팔아 달라고 할까 싶다. 우리 정숙 씨의 당근 마켓이 더욱 번성하길 소망한다.



#뭐라도쓰고팠던 #소소한일상의기록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 삼진 씨의정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