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박보람 Nov 16. 2022

겨울 마음

아무 말 대잔치


1.

마음이 차분하게 모이지 못하고 쉽게 흩어지는 밤이다. 민들레 씨를 후하고 불면 씨앗들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것처럼.


초등학교 때 내가 좋아하던 선생님부터 성인이 되어 절교한 고등학교 친구까지 다양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고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든다. 비가 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에너지가 남아 도나? 왜 이렇게 잡생각이 많을까 별일이다 싶지만 오늘은 그냥 마음이 실컷 방황하도록 내버려 둔다. 오랜만에 얻은 자유에 신이 난 마음은 더욱더 깊은 곳까지 여행을 하고 상상 속의 말풍선을 만들어낸다. 풍선들을 지면으로 끌어내리면 내릴수록 심상의 언어에는 더 큰 힘이 실린다. 이 공간 저 공간을 기웃거리며 내 마음이 얻고 싶어 하는 건 뭘까?


내 마음이지만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젠 동동거리는 마음이 밉지만은 않고 귀여워도 보이니 그것만은 다행이다.



2.

작년부터 주위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조금 민망한, 일 년에 한 번 연락이 닿을까 말까 한 지인이 결혼을 한다고 나에게 연락을 했다. 이제 이런 톡에 익숙해져서 나도 '우와, 축하해.'라는 영혼 없는 톡을 날리긴 했지만 사실 내가 이 사람의 결혼을 정말 축하하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에게까지 결혼 연락을 돌리는 이 사람의 심중은 뭔가? 나는 결혼만큼 프라이빗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지인에게도 계좌번호를 물어봐서 축의금을 보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잘 사세요~ 행복하길 바랍니다~' 덕담으로 끝낸다. 결혼식이 끝나면 또다시 연락할 일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지금 한국에 사는 30대였다면 이런 껍데기뿐인 톡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생각해본다. 별로다. 진짜 별로다. 나는 껍데기가 싫다.



3.

올해 영주권을 신청하느라 한국돈으로 사백만 원이 넘는 돈을 썼다. 비자로 장사하는 영국 놈들 미워 죽겠다만 남편을 보며 참는다. 그래도 영주권을 받으니 드디어 dual identity에 쐐기를 박는 기분이 들어서 홀가분하다. 도비 이즈 프리! 거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앞으로 겨울에는 영국에 있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영국에서 비자 문제로 쓴 돈을 다 합치면 대학원을 한번 더 다닐 수 있다. 그 정도로 영국에서 비자를 신청할 땐 돈이 많이 깨진다. 이민자 입장에서는 화나는데 생각해보면 영국 입장에서는 이게 맞다. 이 정도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과 알쓸신잡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영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자국에서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싶은 것이다. 한국도 분명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능력도 없고 한국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도 없으면서 한국의 의료서비스를 노리고 오는 이민자가 있다면 자국민 입장에서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물론 착하고 능력도 있지만 사정이 생겨 돈을 지불할 수 없는 이민자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까지 봐주기엔 원칙주의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큼 만만한 파라미터가 없는 걸 어떡하리오.


영국 놈들아 이제 내 돈 그만 뺏어가.



4.

이 궂은 날씨에도 일이 끝난 후 텅 빈 오피스에 남아 나와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학생이 있다. 배우자가 한국인이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배우자는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교포 2세였고 학생은 장모님과 장인어른하고 대화를 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거였다. 이 사실을 학생과 공부한 지 일 년이나 흐른 후 알게 되었는데 뭔가 코끝이 찡하면서 감동적이었다.


사랑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사랑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세상까지 안아주려는 그 노력과 마음이 너무 아름답다. 1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학생의 한국어 실력은 이제 꽤 많이 늘어서 한국인 배우자에게 영국인 남편이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상황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이 재미있는 상황이 뿌듯하면서 뭉클했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조쉬에게 해주면 조쉬는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한국어 책을 꺼낸다. 오늘은 갑자기 내비게이션 마냥 "왼쪽으로 가십시오."라는 문장을 큰 소리로 외치길래 어이가 없어서 마구 웃었다. 정말 왼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한국인이고 한국어까지 가르치는데 몇 달째 일상 대화에서 별 도움도 안 되는 '-으십시오/십시오'를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이 좀 짠하다.


...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학생이다.


화려한 조명빨로 견뎌야 하는 축축한 영국의 겨울.
작가의 이전글 저는 고소공포증인데 어떡하나요?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