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람 Dec 07. 2022

안타까운 영국의 의료시스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NHS

코로나가 터지고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세계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 시기에 한국은 의료선진국이라는 근사한 별명을 얻었고 해외에 사는 나는 한국에 사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부러웠다. 해외 살이를 하다 보니 마음 놓고 아플 수 있는 나라에 산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다.


한국에서는 간호사로 일해 본 경험이 있고 영국에서는 보건학을 공부하며 영국과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좀 더 면밀하게 비교해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환자 입장에서는 의료선진국이지만 의료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의료 희생국이다. 한국의 현 의료체제 아래에서는 의료진들이 뼈와 살을 갈아 넣어야 병원이 유지된다. 마음 놓고 휴가를 쓰는 건 너무 어렵고 외래에서는 의사 한 명이 수십 명의 환자를 봐야 하니 3분에 한 명씩 환자를 봐도 하루가 빽빽하다. 하지만 그만큼 환자입장에서는 예약할 수 있는 슬롯이 많고 대기 시간이 줄어드니 빠릿빠릿한 한국 사회에서는 의료진들의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영국은 느리게 가는 문화가 의료 부분에서도 여실히 보인다. 의사와 간호사도 2주씩 휴가를 쓰는 게 가능하고 '빨리빨리'를 위해 직원의 희생이 한국만큼 강요되지 않는다. 대신 환자들이 고달프다. 아주 크게 아프지 않은 이상 의사를 보려면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한다. 영국에서 의사를 쉽게 만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심각하게 아프다는 뜻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영국은 병원비가 무료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무료는 아니고 국민들의 세금으로 NHS (National health service) - 국민 보건 서비스가 운영된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영국 병원의 시설이 근사 할리는 만무하다. 병원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내가 가 본 병원들의 시설은 한국의 90년대 수준에 머물러있다. 대기시간은 어마어마한데 환자들이 편하게 기다릴 수 있는 대기 공간도 부족하고 의료 기구도 이걸 21세기에 쓴다고? 싶은 물건들이 많다. 한국처럼 1차 병원에서 진료의뢰서를 받아 쉽게 3차 병원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병원의 의사를 보려면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를 먼저 봐야 하는데 동네 병원의 의사를 보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운 좋게 동네 의사를 빨리 볼 수 있으면 urgent referral의 경우 2주, 아니면 보통 한 달은 기다려야 대학 병원의 의사를 볼 수 있다. 이것도 코로나 이전의 이야기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NHS가 맥을 못 추릴 정도로 망가져서 나의 경우 대학병원 산부인과 검진을 보는데 9개월이 걸렸다. 결국 코로나 이후 사보험을 드는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고 사립 병원을 택하는 사람들의 수도 증가했다. 사보험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건강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이러다 영국이 미국처럼 의료민영화를 시도하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걱정한다.


한때 NHS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사람으로서 영국의 의료시스템이 회복 불가능 수준으로 망가진 것이 정말 안타깝다. 시설은 한국보다 못할지라도 의료진들의 진심만큼은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였다. 영국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페이는 그리 높지가 않다. 의료시스템 자체가 세금으로 운영되니 의료진들의 월급 또한 공무원들의 페이처럼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열악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그들의 사명감은 한국에서 겪어보지 못한 레벨이었다. 정신적으로 힘들던 시절, 의료진들이 나의 집을 매일 매일 방문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는데 어떤 간호사는 식사를 잘 하지 못하는 내가 걱정된다며 나에게 전화를 걸어 밥은 잘 먹었는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안부까지 물어봐주기도 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의사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힘든데 의료진을 만나고 난 뒤로는 걱정이 크게 놓인다. 그들이 환자 한 명당 들이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노력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자 한 명당 들여야 하는 input이 많아서 대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걸 경험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NHS의 긴 웨이팅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이곳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국과 한국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본다. 환자들은 적당히 기다린 후에 적당한 돈을 지불해 적당한 시간 동안 진료를 보고, 의료진들도 적당한 인프라가 갖춰진 곳에서 일하며 쉬고 싶을 때 적당히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서 영영 나오지 않을, 그런 적당한 의료시스템을 머릿속에서 그려 본다.


해외에서는 안 아픈 게 최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