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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람 Jul 18. 2023

런던과 공원

런던에는 무려 3000개의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그 면적을 다 합치면 런던 땅의 18%가 녹지대라고 하니 런던이 스스로를 'green city'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런던 어디를 가도 오 분에서 십 분쯤 걸으면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쉴 수 있는 공간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담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청설모와 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도심 속인지 아니면 한적한 외곽인지 구분이 안 되기도 한다.


공원은 런더너들에게 산소와도 같은 존재이다. 영국도 전 세계를 괴롭히는 기후 변화를 피할 수 없어 매 여름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다. 특히 인구밀도가 높고 교통량이 많은 런던은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나 더 덥고, 폭염이 찾아오는 시기도 빨라지는 듯하다. 원래부터 이렇게 더운 나라가 아니었기에 런던 대부분의 건물이나 대중교통에는 에어컨이 없다. 보통 영국의 집들은 기본 50년에서 100년도 더 전에 지어져서 벽에 구멍을 하나 내기도 겁이 나는데 에어컨을 설치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런더너들이 에어컨 없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가까운 공원에 가는 것이다. 얼마 전 주말에도 아직 6월밖에 안 됐는데 기온이 30도를 웃돌았다. 이럴 때 에어컨이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의 체감 온도는 30도를 훌쩍 넘는다. 상의할 것도 없이 남편과 돗자리와 먹을 음식 조금, 그리고 책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동네 공원에는 이미 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피고 드러누우니 이제야 살 것 같다. 그늘 아래에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널브러져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공원은 공짜 에어컨이나 다름없다.

널브러져 있기에 안성맞춤

공원은 아이들에게 훌륭한 교실이자 놀이터가 되어주기도 한다. 날씨가 좋은 여름에는 아침 9시가 넘어 공원에 가면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장애물 게임을 하며 어찌나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노는지 나까지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무엇보다 푸르른 잔디밭 전체가 아이들의 교실이 되어 준다는 사실이 멋지다. 3시가 넘어 하교 시간쯤에 공원에 가보면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공을 차고 마음껏 뛰어다니며 논다. 학원 걱정 없이 엄마가 "저녁 먹어야지!" 소리칠 때까지 잔디밭에서 신나게 뒹군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은 공원 연못에 사는 아기 백조와 오리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엄마가 건네주는 상추를 조심스럽게 먹여보기도 한다. 이럴 땐 잔디밭 대신 아스팔트와 사교육으로 점철된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영국 아이들의 유년 시절이 부럽다. 그리고 나의 유년시절과 별 다르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서울의 아이들이 생각나 씁쓸해지기도 한다. 서울 부모님 댁 맞은편 학교 앞에는 여전히 하교 시간에 맞춰 노란 학원 버스들이 줄을 짓는다. 어린아이들을 싣고 떠나는 노란 버스들을 보며 ‘이게 아이들을 위한 최선일까’란 의문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공원이 곧 학교이자 교실이다.

공원은 내가 우울증에 걸려 허덕일 때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치료책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자연의 이로움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거였고 "운동을 해야 건강해져요."와 맞먹을 정도의 진부한 팩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런던으로 이사를 와서도 나는 한국 사람이었기에 한국식으로 뭐든지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고 일했는데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공원이고 나발이고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건강에 탈이 생겨 강제적으로 전원을 끄고 많은 걸 내려놓고 보니 공원의 푸르름이 그제야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에 자연으로 둘러싸인 쉼터가 있었는데 나는 왜 숨을 못 쉬고 살았을까, 내 자신이 좀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1일 1 공원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레인 부츠를 신고 공원에 나갔다. 재밌는 건 공원에 매일 출석체크를 하다 보니 나처럼 공원에 자주 오는 사람들과 안면이 트여 가볍게 눈인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일 바람막이 외투와 선글라스를 끼고 산책하시는 할머니, 사모예드부터 코카 스패니얼까지 다양한 개들을 산책시키는 도그 워커 (dog walker), 그리고 점심시간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조깅하는 청년까지. 이 역동적인 공원의 에너지는 울창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함께 매일 신선한 영혼을 내게 불어넣어 주었다.

공원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식물들

공원을 사랑하는 마음은 물 흐르듯 당연하게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자연의 덕을 많이 본 이후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대하는 자세가 조금 달라졌다. 결국은 나무들과 풀이 모여 공원이 되고 숲이 되는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으려 한다. 자연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무료로 나를 회복시켜 주었는데 나도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 보답의 일환으로 플라스틱 물병, 봉투, 반찬통 사용을 많이 줄였다. 솔직히 아예 안 쓰는 건 너무 힘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개인 물병과 천가방을 항상 가지고 다니고 반찬통도 유리로 된 걸 쓰기 시작했더니 확실히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이 줄었다. 플라스틱의 무차별한 사용은 사람의 생식계 건강과도 연결된다고 하니 자연도 살리면서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1석 2조의 생활 패턴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공원을 비롯한 자연의 힘은 실로 거대하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숨만 쉬는 것으로 사람의 면역계와 신경계, 호르몬 순환이 증진되고 우울증, 불안 장애가 개선된다는 연구가 있다. 나 또한 이 효과를 톡톡히 봤으니 자연이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런 녹지대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영원히 있어주지는 않을 거란 사실이다. 녹지대를 잃는 건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다 같이 죽는다는 말과 같다. 우리 동네 공원에만 12종이 넘는 새들과 곤충, 동물들이 살고 있는데 산 하나를 깎을 때마다 죽어나가는 생명체들을 생각하면 그 수를 감히 헤아리기도 어렵다. 사람들이 이렇게 괴롭히는데도 묵묵히 일용할 공기와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공원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오늘도 책과 물통을 들고 공원으로 나선다.

얘들아 사람들이 지켜줄게- 무럭무럭 자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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