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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green Aug 15. 2020

[영화] 피카소의 <게르니카>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은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절망 뿐인 미래의 지구를 보여줍니다.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는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과거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날 전처 ‘줄리엔’(줄리안 무어 분)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줄리엔은 테오와 함께 사회운동가로 활약했던 인물로, 테오와는 달리 여전히 불법 이민자들을 돕는 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한 소녀를 돕기 위한 통행증을 만들어달라는 줄리엔의 부탁으로 테오는 정부기관에서 고위관료직을 맡고 있는 사촌 ‘나이젤’(대니 휴스톤 분)을 찾아갑니다. 나이젤은 미술품 관리청의 최고 책임자인데, 그의 집무 공간 한쪽 벽을 차지한 거대한 그림이 눈에 띕니다. 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게르니카>입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Cubism)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지난 글에서 피카소가 입체주의의 대표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완성하기 이전의 작품들을 청색 시대(Blue Period)와 장밋빛 시대(Rose Period)로 나누어 살펴봤는데요, 이번에는 입체주의 시기 이후에 그려진 피카소의 그림을 소개하려 합니다. 


파블로 피카소, <잠자는 농부들>, 1919;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1922;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

1920년을 전후로 피카소의 스타일이 조금씩 변하는데, “질서로 회귀(Return to order)”하려는 당대 유럽의 미술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1차세계대전(1914-18) 이후 등장한 것으로, 20세기 초에 유럽미술계를 강타한 –너무나 전위적이어서, 마치 전쟁처럼 혼란만을 안겨주는- 현대미술 대신 질서와 규칙이 있었던 19세기 말의 고전주의(Classicism) 혹은 사실주의(Realism) 경향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여기에 1917년 초에 다녀왔던 이탈리아 여행 경험까지 더해져 이 시기에 그려진 피카소의 작품은 이전 입체주의 시기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잠자는 농부들>과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입체주의 시기에 그려진 여인들처럼 조각조각 해체되었다가 재결합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와 함께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여인과 흡사하지요.


파블로 피카소, <목욕하는 여인>, c.1930; <붉은 색의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 1932; 호안 미로, <여인>, 1934

신고전주의 경향 이후, 피카소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1939-45) 사이에 시작된 초현실주의(Surrealism) 화풍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 안에 억압되어 있던 순수한 정신을 발현시킴으로써 전쟁 이후 물리적/정신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던 이들입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무의식을 포착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강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기묘한 꿈의 세계를 화면으로 옮기는 방식입니다. 초현실주의는 작가들마다 너무나 다양한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의 화면이 어떤 특정한 조형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1930년대에 그려진 피카소의 <목욕하는 여인>, <붉은 색의 안락의자에 앉은 여인>에 나타나는 형태들과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Joan Miró)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파블로 피카소, <기타, 악보, 유리잔>, 1912

한 사람의 작품 세계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화면을 보여주는 피카소는 현실 정치에도 큰 관심을 가졌던 화가입니다. 입체주의 시기의 작품 <기타, 악보, 유리잔>에 표현된 기타는 입체주의자답게 해체-재구성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그림으로 그려진 유리잔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화면 아래 “LE JOU”라는 글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종이는 1912년 11월 18일에 발행된 신문 ‘르 주흐날(Le Journal)’의 1면을 오려온 것으로 그 아래 적힌 당일의 헤드라인은 “La Bataille s'est engage”, 즉 “전쟁이 시작되었다”라는 제목을 가진 기사입니다. 실제로 불가리아군이 터키를 공격했던 발칸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기사를 채택한 것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피카소의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349.3x776.6cm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소도시 게르니카에 나치의 폭격이 감행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약 1,5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어요.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스페인 태생의 미술가 피카소는 분노에 휩싸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세로 3.49미터, 가로 7.76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크기의 <게르니카> 안에서 폭력에 짓밟힌 사람과 동물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완성 후 1937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출품되었고, 이후 전세계를 순회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리게 되지요.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함께 피카소의 대작으로 꼽히는 <게르니카>는 미술사에서 가장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담은 그림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게르니카>를 소장한 인물은 이제 완전한 소멸 밖에 남은 것이 없는 지구의 예술품을 모으는 미술품 관리청장이에요. 그가 수집했을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피카소의 그림을 골라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어 놓았지요. 지구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게르니카>만큼 잘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선택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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