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tgreen Mar 10. 2021

[드라마] <퀸스 갬빗>과 로자 보뇌르

넷플릭스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퀸스 갬빗>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매력적인 여성 체스 플레이어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 분)의 성장기를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하먼은 지하실에서 생활하는 관리인 아저씨에게 체스를 배우면서 그 천재성을 드러내는데, 여성 체스 기사가 손에 꼽히던 시절 전세계를 누비며 챔피언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하먼의 이야기는 특히 여성들에게 일종의 통쾌함을 선사하는 듯 합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던 무엇인가를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해내는 하먼의 여정에 로자 보뇌르(Rosa Bonheur)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로자 보뇌르, <양들에게 소금을 주는 피레네 산맥의 목동>, c.1864
로자 보뇌르, <길고양이>, 1850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하먼은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되어서야 새어머니 알마(마리엘 헬러 분)의 눈에 띄어 입양됩니다. 알마는 하먼을 데려와 앞으로 그녀가 살게 될 공간을 보여주며 “동물을 좋아한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거실에 걸린 그림을 소개하는데요. 두 작품은 보뇌르의 <양들에게 소금을 주는 피레네 산맥의 목동>과 <길고양이>입니다. 흔치 않은 여성 체스 플레이어로서 호기심 어린 세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하먼과 보뇌르의 그림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로자 보뇌르, <니베르네에서의 경작>, 1849

보뇌르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했던 동물 화가로 1865년에는 프랑스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일종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를 수여 받은 최초의 여성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중반은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전통적인 역사화나 종교화의 가치가 덜해지고 오히려 풍속화나 풍경화 혹은 정물화가 더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시대입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예술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던 귀족들이 몰락하고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귀족들이 선호했던 종교적이고 역사적이며 신화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들보다는 일상적인 주제를 그린 그림들에 대한 수요가 많아진 것이지요. 특히 ‘동물 그림’은 누구라도 별다른 고민 없이 거실에 걸만한 편안한 주제였기 때문에 매우 인기가 많았는데 보뇌르는 당대 동물을 표현하는 데 가장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소떼를 이끌어 밭을 가는 일상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장면을 담은 <니베르네에서의 경작>은 1849년 살롱전 출품작으로, 보뇌르가 화가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로자 보뇌르, <마시장>, 1852-55

보뇌르의 대표작 <마시장>은 격렬하게 날뛰는 말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세로 2.4m, 가로 5m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담은 그림으로, 동물 화가가 그린 작품 중에서는 최대 규모입니다. 보뇌르는 동물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수의학과에서 시행되는 동물해부실습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도살장에 자주 들러 동물들의 사체와 뼈를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부학실습, 도살장, 마시장 등은 모두 당대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었어요. 보뇌르는 활동상의 편의를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치마를 입는 대신 바지를 선택했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바지를 입기 위해 매번 경찰국장에서 남성복을 입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보뇌르가 많은 동물 중 에너지, 힘, 남성다움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알려진 ‘말’을 그린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마시장> 그림 한가운데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은 채 말에 올라타 관람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보뇌르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저 연약하다고만 여겨지는 여성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남성들만의 세계라 생각되던 곳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보뇌르의 기세가 느껴집니다. 


에두아르 두브페, <로자 보뇌르의 초상>, 1857

19세기 프랑스에서 초상화가로 활동했던 에두아르 두브페(Édouard Dubufe)가 그린 <로자 보뇌르의 초상>입니다. 처음에는 테이블에 기댄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것이 따분하다고 생각한 보뇌르가 두브페의 동의를 얻어 테이블 대신 갈색 황소를 직접 그려 넣었다고 해요. 왼손에는 화첩을, 오른손에는 붓을 들고 거대한 황소와 함께 서 있는 보뇌르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합니다. <퀸스 갬빗>의 하먼이 머무는 집에 걸린 보뇌르의 그림은 그저 우연이었을까요? 마침내 체스 세계 챔피언이 된 하먼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하얀색으로 무장한 ‘여왕-퀸’이 되어 씩씩하고 행복하게 공원을 걷는 마지막 장면에서 보뇌르가 여성으로서 헤쳐 나갔던 길을 하먼 역시 걷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을, 오늘도 누군가는 힘차게 걸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