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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green Aug 11. 2020

[영화] <500일의 썸머>와 세이렌

영화 <500일의 썸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감독 마크 웹(Marc Webb)의 영화 데뷔작 <500일의 썸머>는 독특한 로맨스 영화 추천 리스트에 종종 언급되는 작품입니다. 기념일 카드에 인쇄될, 조금은 뻔한 인사말들을 만드는 카피라이터 ‘톰’(조셉 고든 레빗 분)은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던 중 회사에 새로 입사한 비서 ‘썸머’(주이 디샤넬 분)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립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매력적인 썸머는 딱히 연애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듯 합니다. 그렇게 그녀의 주위를 맴돌기만 하다 드디어 썸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찾은 톰, 가지 않을 작정이었던 회식 자리에 기꺼이 참석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곳에서 톰과 썸머의 특별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루이 메츠, <죽음의 배>

 작은 무대에 올라 귀엽게 노래 부르는 썸머와 그런 그녀를 설레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톰. 그런데 썸머의 뒤로 그림 한 점이 눈에 띕니다.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구상화가 루이 메츠(Louie Metz)의 <죽음의 배(Ship of Death)>입니다. 톰과 썸머가 회사 동료들과 즐거운 저녁시간을 즐기는 이 장면은 로스앤젤레스의 술집 ‘레드우드(The Redwood Bar & Grill)’에서 촬영되었는데, 메츠의 작품은 영화 촬영 장소로 결정되기 전부터 이 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살펴보다 보면 마치 영화를 위해 새로 제작된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그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죽음의 배>를 통해 추정해본다면, 화면의 좌측에 앉아 있는 인물은 전설 속에 존재하는 단순한 인어가 아니라 ‘세이렌(Seiren)’ 혹은 '사이렌(Siren)'일 것입니다. ‘세이렌’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우스의 모험 이야기 『오디세이아』 에 등장하는 바다의 요정입니다. 이들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에 살면서 매혹적인 노래로 지나가는 선원들을 유혹하여 암초로 유인, 결국 배를 난파시켜 버립니다.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는 도중 만났던 마녀 키르케는 그에게 세이렌의 이러한 유혹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키르케의 말대로 모든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게 한 오디세우스, 정작 자신은 세이렌의 노래소리가 궁금하여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세이렌들의 섬을 지나가게 됩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사이렌들>, 1891, 100.6x202cm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오디세우스와 사이렌들>, 1909, 175.9x210cm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풍을 보여주었던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와 영국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화가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가 그린 동명의 <오디세우스와 사이렌들>이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입니다. 무시무시한 곳을 서둘러 빠져나가기 위해 밀랍으로 귀를 막고 그 위를 다시 천으로 꽁꽁 둘러싼 선원들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가운데, 돛대에 몸이 묶인 오디세우스가 세이렌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드레이퍼가 그린 오디세우스의 얼굴을 보면 그는 이미 무엇인가에 홀린 듯 열띤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작품의 차이점을 찾으셨나요? 드레이퍼의 세이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하반신이 물고기로 표현된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하지만 워터하우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세이렌들은 여성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전에 가까운 묘사는 워터하우스의 것이지만, 세이렌을 보다 요염하게 표현하기 위해 점차 인어의 형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키르케의 조언 덕분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세이렌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지만 평범한 선원들은 모두 부서진 배와 함께 죽음에 이르렀지요. 자, 다시 영화 <500일의 썸머>로 돌아갑니다. 사랑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썸머와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드는 톰, 그리고 썸머의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세이렌. 보이시나요, 톰이 탄 배가 암초를 향해 격렬히 나아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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