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기억났다. 내가 여름을 기다렸던 유일한 이유. 주황빛, 아니, 주황을 넘어 붉게 물들었던 손톱. 그 색은 단지 꽃의 색이 아니라, 엄마의 손끝에서 시작된 여름의 색이었다.
학교 담벼락 아래 봉선화가 피기 시작하면 여름이 왔다는 신호 같았다. 분홍, 보라, 빨강, 하얀 꽃잎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나고, 그 중에서도 엄마는 ‘잎파리’를 따기 시작했다. 곧, 우리 자매의 손톱도 여름으로 물들 차례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내 손톱만 진하게 물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선명함의 비밀을. 엄마는 꽃보다 잎을, 예쁜 색보다 깊은 색을 골랐다. 그리고 백반을 섞어 진하게 우린 잎을 우리 손톱 열 개에 듬뿍 올리고는 비닐로 꼭 싸매주셨다.
“엄마, 피 안 통해—”
“참아! 예뻐질 거야~”
엄마의 단호한 그 한마디에, 우리는 두 손을 배 위에 포개어 얌전히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 손톱에 번져 있을 붉은 빛을 기대하며.
봉선화는 우리의 시간이었다. 손톱 끝에 정성스레 얹어준 사랑,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던 온기, 오롯이 나와 엄마만의 세상이었다.
한때 나는 화려한 네일아트에 빠졌었다. 형형색색,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손끝을 꾸미고 그걸 통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하지만 엄마가 되어 아이를 품고 어느새 그 손톱은 다시 맨살로 돌아왔다.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다정한 기억.
며칠 전, 여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또 봉선화를 물들여주고 있다며, 그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그리고, “우리 유선이도 해주고 싶다.”라고.
순간, 마음이 찌르르했다. 엄마의 손길, 우리만의 세상이 다시 떠올랐다. 그 손톱 위의 작은 우주처럼, 우리만의 이야기를 담던 그 여름의 풍경이.
나도 그러고 싶다. 화려한 매니큐어 대신, 청순한 봉선화 물이 드는 그 시간.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 그 손끝의 계절을 전하고 싶다. 함께 웃고, 함께 잠들고, 손끝에 사랑을 물들이는 여름을.
그렇게 다시, 봉선화가 물든 계절이 우리 곁에 찾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