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과 강제성 사이
퇴사 후 어쩌다보니 시간이 많아졌다. 많은 시간은 곧 나에게 '자유'를 의미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 퇴사했기에, 조금이라도 빡빡한 스케줄이 생기려고 한다거나, 일정한 루틴이 생기려고 하면 다시 느슨한 시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관성이 생겼다. 잘 수 있는 시간, 아무 때나 밥먹을 수 있는 시간, 연체동물처럼 널부러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나에게 소중하니까. 나에게 자로 잰 듯한 시간의 경계가 없어졌다. 24시간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많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결과는 그 정반대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24시간,
일주일,
한 달이
주어지면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을까?'
약 3년간의 테스트 끝에 얻은 나의 결론은 시간이 많을수록 효율성을 떨어지고, 날카로운 삶의 균형은 점점 무뎌진다는 것이다. 강제로 시간을 나누지 않았기에 여유로웠지만, 그만큼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점에는 더 느릿하게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자율성과 적당한 강제성, 그 중간이었다. 그 적정한 수준을 나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내 최대 과제가 되었다. 아마도 많은 프리랜서들의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창조루틴이 필요해
매일 같은 시각 무엇을 해야할지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좋아하는 수업을 듣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또 결정적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일을 꾸준하게 해보고 싶었다. 영감은 어느 날 갑자기 번개맞은 것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보다도 끈기있는 엉덩이가 필요했다.
창조루틴을 함께 할 사람은, 일단 1) 창작욕구가 있는 사람 2) 나와 비슷한 수준의 열정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 3) 특정 장소에서 만나 서로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시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 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8월 한달 내내 포토샵, 애프터이팩트, 일러스트레이터 수업을 함께 들었던 미대언니 경수님에게 배운 걸 써먹을 겸, 매주 창조루틴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창조루틴이 어느정도 효율적으로 시스템화 되면, 함께 할 사람을 모집해 더 큰 아이디어 집단으로 발전시켜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장 먼저한 것은 일정관리.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프로젝트 일정을 정리할 문서를 만들고, 프로젝트 별로 진행상황을 함께 공유하로 했다.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파일을 만들면 어느곳에서나 수정이나 내용 확인이 가능하고, 또 url로 공유가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기분과 그럴싸해 보인다는 것.
그 동안 내 직함을 정하지 못해 명함 만들기가 망설여졌다. 단순히 회사명과 직급으로 규정될 수 없는 프리랜서의 명함에는 한 단어로 끝내지 못한 나에 대한 어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세 문장으로 나를 규정할 수 있는 명함 템플릿을 만들었다. 물론 누구 말마따라 굳이 일러스트레이터까지 안배워도 제작 가능한 너무나도 심플한 디자인이긴하다. 그러나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나를 다 담을 수 있고, 내가 넣고 싶은 정보를 지저분하지 않게 정돈했다는 점에서 결과물에 만족한다.
내친김에 남편 명함도. ㅎㅎㅎ
꼭 명함을 만들지 않더라도, 차포떼고 나를 설명해 줄 ‘세 문장’을 고민해본다는 건 매력적이고도 의미있는 일 같다. 이 명함 템플릿을 #프리랜서명함 템플릿으로 발전시켜 지속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보고 싶다.
내친김에 마스코트까지 만들어보기로 했다. ㅎㅎ 서울빛초롱축제의 마스코트 공모전인데 응모기간은 이 달 말까지다. 서툰 일러작업으로 마스코트를 만드는 작업은 녹록치 않겠지만, 우린 팀이니까! 창조루틴의 힘을 빌어 열심히 스케치 해보는 중. 오늘은 간단한 브레인 스토밍을 마쳤다.
역시 가장 먼저 올리는 건 장비빨. 캐릭터 드로잉을 위해 스케치북부터 사는 나는... 참 나다.
이건 내 개인적인 창조루틴을 위한 새로운 도전 중 하나이다. 서울자유시민대학에서 대학연계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이번 가을 학기에 세 과목을 듣기로 했다. 하나는 연세대에서 하는 '대중미디어' 관련 수업이고, 나머지 둘은 한양대에서 들을 수 있는 '건축' 수업, 그리고 '현대 시' 수업이다. 대학교 교양수업과 같은 수업들을 또 언제 들을 수 있으랴 하는 마음으로 또 새로운 루틴의 시작을 위해 좀 빡빡한 일정을 세워봤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두근거리는 것은 학식이다. 얼른 학교가서 밥 먹고 싶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함께 일 할 수 있는 장소로 괜찮은 곳을 점 찍어뒀다.
가장 중요한 장소 이야기는 다음 번에.
창조루틴은 계속 됩니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