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
인터넷으로 수납박스를 사서 한참을 정리하고 나니 바닥에 푸른색 애벌레가 보였다. 새끼손톱 길이보다 짧은, 아주 작은 새싹 색깔의 귀여운 애벌레였다. 아무리 귀엽다고 해도 함께 살 수는 없어서 애벌레를 밖에 놓아주기로 했다. 주변에 있는 것은 비닐 뽁뽁이(완충제) 뿐이었는데, 그걸로 애벌레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작은 애벌레는 몸을 둥글렸다 폈다 할 뿐 좀처럼 비닐 위에 올라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몇 번을 실패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빨래집게가 보였다. 보통 빨래집게보다 조금 더 커서 두꺼운 빨래도 넉넉하게 잡을 수 있는 하늘색의 빨래집게였다. 그건 애벌레를 잡기에 적당한 도구가 아니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집게를 벌렸다가 다시 손에 힘을 빼면 앞부분의 집게가 틈 없이 다물어져서 빨랫감을 꼭 붙들고 바람이 불어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집게는 힘이 세고, 그 사이에 애벌레가 들어가면 찌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집게를 들었다. 일어서서 다른 도구를 찾기가 귀찮았을 것이다. 집게로 애벌레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힘 조절만 잘한다면 애벌레가 그 사이에서 적당한 압력을 받으며 머무를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살짝 잡아서 애벌레를 들어 올린 다음 바로 문 밖에 놓아주면 될 것 같았다. 빨래집게로도 애벌레는 잘 잡히지 않았다. 내가 살짝 힘을 주어 벌린 빨래집게 사이는 애벌레의 몸보다 조금 넓었다. 나는 벌린 빨래집게를 애벌레의 몸 양쪽에 두고 손에 살짝 힘을 뺐다. 집게가 살짝 조여지나 싶더니 애벌레의 몸에서 살짝 물기가 배어 나온 것 같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미 애벌레가 죽은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다시 빨래집게로 집어 낮은 돌담 안 화단에 놓아주었다. 동그랗게 말린 애벌레는 마른 흙 위에서 미동이 없었다. 나는 오래 보지 않고 들어와 빨래집게에 소독제를 뿌리고 닦았다. 바닥에도 물방울이 떨어졌던 것 같아서 애벌레가 있었던 주위를 닦았다. 연두색의 애벌레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종’의 생물에서 나온 물기가 찜찜했다.
거미
그릇 서랍을 정리하는데 거미가 있었다. 아주 작고 옅은 색깔의 거미였다. 베이지색이랄까, 갈색이랄까, 동그랗고 작은 몸통에 몸에 비해 조금 긴 듯한 얇은 다리를 가진 거미였다. 서랍 속에 살게 두더라도 아무 일도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릇들과 함께 닫힌 서랍 안에 거미를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위생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 같았다. 행주에 살짝 달라붙게 해서 밖에 놔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손으로 살짝 다리를 집어서 옮기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서랍에서 꺼내 서랍 위 조리대에 옮기는 일은 너무 순식간이라서 그 정도는 거미에게도 아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내가 거미를 잡을 수만 있다면. 나는 서랍 속의 거미 다리를 잡아 살짝 들어 선반에 올려뒀고, 그 순간 내가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미는 잠시 다리를 어색하게 버둥거리나 싶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두 개의 다리가 다른 두 다리보다 가깝게 붙어 꼬인 것처럼 보였다. 거미는 두 개의 다리가 꼬인 채로 균형을 잡지 못했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움직임을 멈춘 거미는 서랍 속에서보다 더 작고 하찮아 보였다. 흡사 작은 먼지 같기도 했다. 거미의 다리를 잡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너무 연약해서 사람이 다리를 잡아들어 올리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들렸을 때 충격이 너무 크거나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죽게 되는 것이다. 애벌레를 빨래집게로 잡으려 들 때처럼 거미는 너무 연약해 보여서,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죽을 것이 분명했는데도 나는 조금 귀찮아서 거미를 손으로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거미를 싱크대를 닦으며 같이 휴지에 싸서 버렸다. 작은 거미는 어느 날 싱크대 서랍 속에서 죽은 채 발견됐을 수도 있지만, 살려주려는 나의 따뜻한 의도가 거미를 더 빨리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죽음에 대한 긴 고찰은 파리나 지네, 특히 바퀴벌레에 이르러서는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카프카의 소설은 그래서 명작인 걸까.
개
인간은 인간이 아닌 종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제주도 시골마을에 산다. 이사 오기 전에 주변에 묶여 사는 가여운 개들이 있지 않을까 조금 둘러보았는데, 안일한 마음으로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집을 구하려는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마음으로만 ‘주변에 불쌍한 개들이 없어야 할 텐데’하고는, 딱히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까이에 이웃집들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가 사는 골목 안쪽까지만 들어가 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터를 사이에 둔 집 담벼락 안쪽에 평생 철장 안에만 사는 강아지가 한 명 있고, 집에 들어오는 길목의 하우스에도 정말 귀엽게 생긴 큰 강아지가 있다. 사료는 먹어본 적이 있었을지 모르겠고, 늘 물은 없이 지내는.
그리고 바닷가 쪽으로 향하는 도로가에 닭장을 지키는 외로운 개들이 있었다. 정말 닭장을 지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휑한 공터에 고무집만 덩그러니 있고, 줄은 딱 1미터의 쇠줄. 이사 와서 처음 봤을 땐 새끼 강아지까지 세 명 있었고, 지나가는 보리와 나를 향해 경계하듯 짖었다. 큰 개 둘은 서로 의지하는 듯 보였는데, 얼마 후 흰색 개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새끼였던 강아지가 제법 큰 것 같았다. 나는 새끼를 검은 강아지라고 생각했는데 호구였고, 내가 잘못 봤거나 아니면 개가 바뀐 것일 지도 모른다.
늦가을에 이사를 와서 겨울이 되었고, 나는 더 자주 보는 하우스 앞의 개가 신경이 쓰여 물을 가져다주곤 했지만 공터의 개들에게는 가 보지 않았다. 겨울은 점점 깊어져서 눈이 오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나는 하는 수 없이 공터에 가 보았다. 어느새 호구 강아지는 많이 자라 있었고, 그 개들은 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다. 사료와 따뜻한 물을 줬다. 더러운 냄비, 프라이팬 등에는 음식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물을 줄 그릇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그중 하나를 비워 둘에게 차례로 주었다. 개들은 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눈보라가 심하던 어느 날은 개들의 줄이 풀려 있었다. 주인이 멀리 살고, 옆에 있는 식당에서 조금 챙겨주는 정도라고 들었는데, 바람이 너무 심하니 공터에 묶여 있지 말고 안전한데 숨어 있으라고 풀어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갈색의 개는 여성이고, 호구는 남성인데, 둘의 관계는 정확히 모르지만 호구가 놀자는 것인지 자꾸 갈색 개에게 올라타 마운팅을 하려고 했다. 봄이 되면 발정기가 올 텐데 걱정이 됐다.
봄이 왔고, 걱정하던 일은 일어났고, 나는 그 개들의 운명에 관여할 수 없어서 그곳을 피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곳을 지나게 됐고, 내 차를 알아보고 반응하는 듯한 개의 모습에 밥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을 해 버렸다. 며칠 뒤 외출을 하면서 사료와 물을 챙겼다. 길의 개들과 나눠 먹이려고 보리 사료를 좀 더 넉넉하고 저렴한 것으로 주문을 해 둔 터였다. 호구는 보이지 않았다. 새끼들을은 모두 다섯이었고, 하얀 강아지들 틈에 까만 강아지도 한 명 있었는데 둘이 보이지 않았다. 남은 아이들은 셋이었다. 엄마는 갈색인데 새끼들은 어떻게 흰색이거나 검은색이었는지 모르겠다. 밥을 주는데 갈색 어미개가 많이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새끼들을 통통하게 키우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미터 줄에 묶여 새끼들이 젖을 무는 것을 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500g짜리 한 봉지를 다 털어주었다. 새끼들이 밥그릇에 코를 박으면 위협을 해서 쫓았다. 새끼들도 한 달은 족히 넘은 듯하고, 이미 사료를 먹을 시기가 되었다.
밥을 주는데 밭에서 쑥을 캐고 돌아가는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왔냐는 것이었는데, 개들에게 밥을 주러 왔다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다. 주인을 알고 계시다고 해서 사료랑 물도 좀 챙겨 주고, 줄도 길게 해 주고, 그늘도 만들어 달라고 얘기해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개들이 안쓰럽다고, 주인이 바빠 잘 못 챙긴다고 하면서도 그늘도 없다는 말에는 이것들은 괜찮다고, 개들은 그렇게 지내도 괜찮다고 한다. 땡볕이 내리쬐는 날. 뜨거운 고무집 옆의 작은 그늘에 어떻게든 몸을 붙이고 앉아 있는 개를 봤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사람은 선크림도 바르고 모자도 쓰고, 더우면 물 마시고 그늘에 가서 잠시 쉬기도 하면서, 개들은 그 모든 것이 없어도 괜찮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개들은 비를 맞아도 괜찮고, 눈을 맞아도 괜찮고, 바람이 불어도 괜찮고, 더위에 그늘 한 점 없어도, 물을 안 먹어도 괜찮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외국인 노동자
그러나 인간이 인간 아닌 종에게만 냉정하다는 내 생각은 틀렸다. 제주에는 빈집이 많다. 대게의 한국 지방 도시들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에는 빈집들마저도 비싸서 거래도 되지 않는다. 방치된 개들도 많고, 방치된 집들도 많다는 것이 내가 제주에 대해 가진 인상 중 하나다. 짝꿍이 운영하고 있는 공방도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집의 창고를 저렴하게 빌려 쓰고 있는데, 이 집은 3년 전 우리가 이사하려고 할 때도 이미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창고도 있고 넓은 집이지만 그만큼 손댈 데가 많아 빌리지 않았던 집이다. 집에는 보일러도 없고, 창문이며 벽지, 천장은 물론이고 손 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집세가 아무리 싸다고 해도 고치는데 들어갈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구한 다른 집에서 살다가 2년이 지나 다시 집을 구할 때도 이 집은 비어 있었고, 창고만 빌려서 공방을 운영하기로 했다. 공방을 꾸미고 운영하기 시작한 지 4개월쯤 되었는데, 집이 임대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고, 공방에 많은 수고를 들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매매가 되지 않아 결국은 세를 준 모양이다. 세입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했다. 제주에서는(제주도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외국인들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와 있는 외국인들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집을 고치지 않은 채로도 세를 들어와 살 사람들은 외국인들뿐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집 내부를 다시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보일러를 새로 들여놓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에어컨을 들여놓을 거라고도 생각하기 어렵다. 벽지와 장판을 새로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외국인들이 직접 집을 구하기는 어려우니 동네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알아봐서 빈 집을 구했을 것이다.
수리하는데 품이 많이 들어갈, 그냥은 살 수 없는 집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산다는데 납득이 되는 이유는, 이 전에 ‘베트남 노동자’가 살았다는 집을 봤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인이 집을 구한다고 해서 같이 보러 갔는데, 안채는 쓰레기만 치우면 일단 집 꼴은 갖춰졌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에 딸린 바깥채는 한층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곳에 이부자리 같은 게 뭉쳐져 있어 언뜻 이미지가 조합이 되지 않았었다. 한쪽에는 부뚜막인지 아궁이인지 쇠락하여 형체가 불분명했는데, 그 옆으로 생활의 흔적이 있으니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 집에 사람이 살았다고 했다. ‘베트남 노동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생활의 흔적이 이해가 되면서도 혼란이 더 가중되었다. 사람이 여기서 어떻게 살았단 말인가? 사람이 살았었는데, 어떻게 이런 데서 사람이 살았는지 믿지 못한다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살 때는 훨씬 상황이 나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기 힘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집에서 누군가 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았다는 것이, 그 집에서 살도록 빌려주고 돈을 받았다는 것이. 인류애가 다시금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말을 하는 삼춘은 심상해 보였다.
‘나도 외국에 가면’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걸 ‘타지(외국)에서의 고생’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도 되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깨끗하고 안전하고, 춥거나 덥지 않은 집에서 살 권리가 있고, 누군가 그런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의문을 제기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요구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남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게 ‘기본권’이라는 것이고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동물에 대해서도 당연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동물이 자연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그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그렇기에 인간은 말 못 하는 동물을 대신해 ‘동물권’을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나 보다. 다른 이의 처지를 애써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나 보다. 무심해서 거미와 애벌레를 죽게 만든 나, 개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지 않고 개를 키우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는 집 같지 않은 집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비약 같지만 큰 맥락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입해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겠지. 다만 외국인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개를 사랑하며 키울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개를 학대하는 사람이 다른 생명에 대해 관심이 있으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거미와 애벌레를 대하는 나를 보면서 개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만 나는 개들의 생명에 대해 더 생각할 뿐이라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사는 집을 보며 생각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안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라고. 사람의 본성이 무엇에 더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철학의 발전은 인간 본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인간이 살아갈 방법에 대한 고민과 지침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보다 약한 존재의 삶을 살피는 것이, 자신의 삶을 살피는 것과 거리가 멀지 않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외국인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감각. 내가 추운 만큼 다른 누군가도 추울 것이라는 감각.
카프카의 [변신]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요즘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이 유행한다는데, 그것도 상상할 수 있을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을 좀 더 해 보면 어떨까.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 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게 어느 쪽이냐 한다면 내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아무래도 스님이 될 걸 그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