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하사품 앞에 두고
무엇을 떠올리셨습니까
숨겼던 이빨을 으르렁대며
가냘픈 목을 물어뜯은
잔인한 이리떼였습니까
마을 둘 곳 없던 당신께
젖가슴을 내어 주던
양빈의 따스함이었습니까
활줄에 졸려 버려진 채
작은 몸을 일으켜(興)
길(道)을 떠난 당신은
뽕나무 밭이 바다로
스물네 번이나 바뀌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이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얄팍했던 무례가 부끄러워
고개도 감히 들지 못하고
전하의 극락왕생을
이렇게 엎드려 빕니다.
- 슬픔으로 흘러내린 수치심 -
"여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요."
아내가 곧 개봉하는 영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연기라면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배우들이 나오는 사극이라고, 재미있을 것 같다며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전 평소 미국인이 다 부수고 죽이는 게 취향이었지만, 실제 역사를 다뤘다는 아내의 말에 어떤 영화일지 궁금해졌습니다. 늦은 밤 작은방에 앉아 영화 정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69년 전, 조선의 제6대 임금이었던 노산군(魯山君) 이홍위(李弘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요.
제가 알고 있던 노산군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기반 없이 왕위에 올랐고, 숙부가 일으킨 난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게 지식의 전부였어요.
간신들에게 둘러싸인 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했던 나약하고 힘없는 임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서사가 봇물 터지듯 밀려왔습니다. 이제껏 왜곡된 기억을 갖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아내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1457년, 강원도 영월에서 일어났던
그의 마지막 넉 달간의 이야기를요.
시시콜콜하게 역사를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유해진 배우가 맡은 배역이 실존인물이란 것만 얘기했어요. 그리고 이 영화는 단종이 유배된 직후의 이야기란 정도만 말해줬습니다. 평소와 달리 지루한 설명을 하지 않는 절 보고는, 아내는 뭔가 짐작되는 게 있었나 봅니다. 손수건을 챙겨야겠다고 가볍게 농담하며 영화를 예매했거든요. 그렇게 강원도 영월, 작은 고을의 호장이었던 엄흥도(嚴興道)와 서인으로 강등된 이홍위(李弘暐)의 이야기를 보러 갔습니다. 깜빡하고 손수건은 못 챙겼지만요.
궁궐 밖, 강원도 영월에서 시작하는 임금의 이야기는 신선했습니다. 어차피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다 보니,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내 금방 영화에 빠져들었습니다. 비록 서인으로 추락했지만, 한때나마 왕이었던 그의 당당함도 고늘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점점 살아났고요. 하지만 이야기의 큰 틀은 실록 같은 기록에 남겨진 대로 흘러갔기에, 뭔가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걸 조용히 참으며 영화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던 역사와 영화 속 장면이 절묘하게 겹치는 순간, 겨우겨우 누르고 있던 눈물이 터져버렸습니다.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바라보는 노산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일찍이 홀로 된 외로움에, 억울하게 왕을 빼앗긴 설움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이리가 보낸 하사품을 당당히 거부하는 모습에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껏 그를 나약한 왕으로만 치부했던 기억 때문에요. 곧 스스로의 뜻으로 저승문을 여는 임금을 보며, 부끄러움은 슬픔이 되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삼도천 기슭에 당도한 홍위를 임금으로 대하며 통곡하는 엄흥도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전 부끄러움이 다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전하의 강녕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상영관을 나와, 아내에게 실제로 기록된 단종(端宗)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줬습니다. 엄흥도가 단종을 장사 지낼 때의 이야기와 지금껏 제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을요. 아내는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피눈물로 기록된 이야기를 듣고는 짧게 한탄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 영화,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이번엔 꼭 손수건을 챙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