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찾아온 운디네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하여 울고 계십니까

by 보리아빠

15세기 중반, 파라켈수스는 민간 신앙에서 말로만 전해져 오던 4대 정령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는 흙(노움), 공기(실프), 불(샐러맨더), 그리고 물(운디네)로 구성된 만물의 근본에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이중 운디네는 물을 다루는 정령으로, 현재까지도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 자주 등장합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던 거예요. 조금 전부터 그랬다는 아내의 말에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우리 집 문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소리가 크게 들리는 세탁실에서 영상을 찍어둔 뒤, 관리사무소로 갔습니다.


한겨울에 운디네를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요.


관리사무소에 가서 직원을 만났습니다. 업무가 끝난 뒤라 연세가 지긋한 아저씨 한 분만 있었습니다. 촬영했던 영상을 보여드리고 상황 설명을 했습니다. 그분은 몇 번이나 화면을 돌려보고는 뭔가 심상찮다는 걸 느끼셨는지 바로 가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전 혹시라도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싶어 따라갔어요.


급한 대로 랜턴만 챙겨서 아파트 지하에 있는 기계실로 갔습니다. 집안에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는데, 가까운 곳에서 들으니 물소리라는 게 느껴졌어요. 문을 연 순간 눈에 들어오는 고인 물에, 수도가 터졌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오열하고 있는 물의 정령을 맞닥뜨렸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하여 울고 계십니까?


관리사무실 아저씨는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전 집으로 올라가 연장을 챙겨 왔습니다. 그 사이에 아저씨는 버터플라이 밸브를 잠그고 있더라고요. 곧 운디네의 울음은 잦아들었지만, 통곡이 흐느낌으로 바뀌었을 뿐 물은 여전히 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새는 부위를 감싸고 있던 방한테이프를 잘라내고, 배관을 이어주는 부품이 깨진 걸 확인했습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운디네


"아저씨, 이거 플랜지가 나갔네요. 32미리짜리 예비품 있나요?"


부품만 교체하면 될 것 같았지만 재고가 없다는 말에, 그때까지도 눈물을 그치지 않은 운디네가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지보수 업체가 곧 도착한다는 아저씨의 말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 제가 딱히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아저씨께 인사하고 가지고 왔던 연장을 정리하고 집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내는 소리가 그쳤다며 좋아했고, 원인이 뭐였는지, 밑에서 뭘 하고 왔는지 짧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안심하며 잠들었고, 전 잠시 뒤 다시 나가 지하에 사람들이 모이는 걸 확인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곧 운디네의 마음은 진정되었고,

집안엔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다음 날,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전날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봤습니다. 물이 새던 플랜지와 그 주변 부속을 전부 교체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노후되어 바꿀 때는 됐다면서요. 오히려 자기들을 도와줘 고맙다고, 커피 한 잔 근사하게 말아줄 테니 한번 놀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시간이 없어 방문은 못했지만, 조만간 인사는 드리러 갈 생각입니다. 잊은 줄 알았던 설비 쪽 경험을 다시 깨워주신 덕에, 한겨울에 찾아온 운디네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얕은 지식이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운디네를 다독여줄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단수가 되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