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쓸' 만한 사람

by 보리아빠

글을 쓰는 게 주변에 알려지다 보니 청탁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직원 공로패에 들어갈 축전이나 행사 시나리오, 인사말 같은 것들도 간간이 써 주고 있어요. 얕은 재주지만 다른 사람에게 '쓸 만한 사람'이 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에요. 그래서 도록 시간과 성의를 들여 글을 다듬어 줍니다. 선물하는 마음으로요. 그리고 이 노력은 제게도 선물 같은 일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일하던 직원 K가 곧 육아휴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 보니, 아이를 키우며 글쓰기에 도전해 보겠다네요. 하지만 요령이 없어 막막하다는 말에,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작법서를 선물하려 인터넷을 찾아봤어요. 문제는 이미 절판된 책이었다는 거예요. 여기저기 문의했지만 재고는 없었습니다. 직접 전해줘야 했기에 마음이 급해졌어요.


다행히 딱 한 권, 재고가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아 오늘 발송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판매자에 연락했습니다. 성의 있는 리뷰를 미끼로 던졌고, 바로 택배 송장이 등록되었어요. 그리고 K가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 책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K를 탕비실로 불러 책을 건넸습니다. 글쓰기 시작을 응원하면서요. 예상 못 한 선물에 K는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고마워했어요. 이대로 두면 K를 울릴 것 같아 절판된 책을 구한 거라 생색내듯 실없는 말을 해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K는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책장을 펼쳐 '싸인'을 부탁했습니다.


싸인?


작가를 흉내나 낼 뿐인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몸은 정직했어요. 어깨에서 뭔가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거든요. 창피한 마음에 급히 몸을 털어냈습니다. 그러고는 책을 받아서 자리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혔어요. 그동안 받아보기만 했던 걸 해 줘야 한다니, 저도 막막해졌습니다. 북토크나 싸인회에 갔을 때, 앉아 있던 작가님들의 마음도 궁금해졌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는데, 불현듯 '처음'이란 말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처음으로 작가 승인을 받았던 날,

처음으로 팔로우 해주신 분,

처음으로 받아본 따뜻한 댓글,


제가 싸인을 받았던 작가님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마음으로 싸인을 받으려 했는지도요. 알아채지 못했지만, 다른 작가님처럼, 어쩌면 그 모든 '처음'이 차곡차곡 쌓여 누군가에게 '쓸 만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생처음 싸인을 해달라는 K의 부탁이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싸인 대신 그때 가졌던 첫 마음을 책에 담았습니다. 먼저 꿈을 꾼 사람의 입장에서요.


본 대로, 느낀 대로
즐겁게 남기다 보면
낱말이 다붓다붓 모여
이야기가 됩니다.

쓸 생각이 들었다면
쓸 만한 사람이예요.

즐겁게 다녀오세요.


K에게 책을 다시 건네며, 잘 다녀오라고 가볍게 인사했습니다. 표지는 꼭 집에 가서 열어보라는 말과 함께요. 조만간 또 한 명의 '쓸 만한 사람'이 되어 만났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도 지금까지 걸어온 만큼 꾸준히 나아가 좀 더 '쓸 만한 사람'이 돼 보려고요. 그러면 언젠가는 싸인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진짜로 '쓸' 만한 사람이 되겠지요.




무슨 책인지 맞춰보실 분?


덧붙이는 말

'탕비실'이란 말은 일본에서 온 단어라 되도록 쓰지 않으려 했는데, 순화 용어인 '준비실'이 아직 입에 붙지 않아 그대로 뒀습니다. 참고해 주세요.